아나밥티스트의 역사 - 교회와 국가(3)
윌리암 에스텝
그 다음으로는 징계(discipline)가 참 교회의 세 번째 표가 되었다. 형제들은 삶과 행위에서 아나밥티스트의 온전한 증거를 유지하기 위해서 징계를 실행하였다. 아나밥티스트들이 크게 부흥하자 대적들은 그들이 무죄의 완전함을 가르친다고 비난했다. 휘브마이어는 이러한 비난을 단호히 거부했다. “우리가 침례 받은 후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유사한 말로 자랑한다고 하는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침례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변함없이 불쌍하고 가련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아나밥티스트들이 쓴 그리스도인의 삶의 거룩에 대한 글은 때로 그들의 주장이 죄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저자들은 주의해서 그러한 결론을 피했다. 디르크 필립스가 이 점에 관한 한 예가 된다. 침례 받은 신자로서 합당한 행위의 높은 표준에 대하여 디르크 필립스처럼 주장한 사람은 없다. 그는 의(義)의 삶을 추구하도록 신약과 구약에서 일련의 구절을 인용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은 반드시 매우 신중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과 같이 완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과 똑같이 이 세상에서 거룩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며, 사도 바울이 그랬듯이 오직 모든 열심으로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온갖 열심으로 거룩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현세(現世)의 삶에서 무죄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프로테스탄트 국가 교회의 부도덕성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인의 표준에 못 미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의 법령에 의한 종교 개혁은 사도들이 본(本)으로 제시했거나 신약성경이 가르친 삶의 특성을 이루지 못했다. 그레벨은 뮌처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제단과 스위스 개혁주의 사이의 문제 가운데 하나로 ‘열매 없는 믿음’을 열거했다. 일찍이 필그림 마르펙(Pilgram Marpeck)은 루터파의 종교개혁이 열성적인 루터파 사람들의 도덕 기준을 변화시키는데 실패한 것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루터파를 떠나 아나밥티스트로 가게 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그들 가운데 뚜렷하게 구별된 삶의 특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징계를 사용하였다. 공공연하게 드러난 모든 죄의 행위들은 반드시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징계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결코 무력에 호소하지는 않았다. 형제들에게 있어서 모든 교회의 실행을 뒷받침한 것은 사랑이었다. 징계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사랑보다 강조된 것은 없었다.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는 “때로 실족해서 오류와 죄에 빠진” 자들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그러한 자는 은밀하게 두 번 권면을 받아야 한다. 세 번째에는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공개적으로 징계를 주거나 출교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징계나 출교는 빵을 부수기 전에 성령님의 통제하심을 따라 실행하도록 하여(마 5장),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한 빵을 먹으며, 한 잔을 마시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만찬은 아나밥티스트 운동의 시작부터 징계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레벨은 만찬에 관해 뮌처를 훈계할 때 이 중요성을 강조했다. “만약 어떤 형제가 주의해서 형제다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경우, 그는 스스로 정죄를 먹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빵과 잔과 다른 음식과의 차이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는 내적 결합(bond)인 사랑과 외적 결합인 빵에 수치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레벨은 교회의 규례로서 주님의 만찬을 올바르게 준수해야 하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만찬은 미사나 성례전이 아니다. 그러므로 임종(臨終) 때나 그 밖의 어떠한 경우에도 혼자서 받을 수 없다. 빵은 개인을 위하여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개인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하나됨 안에 있는 자들의 빵을 취해서는 안 된다..----” 그레벨은 다른 주제를 언급하기 전에 주님의 만찬과 징계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찬은 반드시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규칙을 따라 지켜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주님의 만찬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8장이 없이는 모든 사람이 외적인 것에만 열중하고 내적인 것, 곧 사랑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휘브마이어와 리드만과 마르펙(Marpeck)도 징계와 주님의 만찬의 밀접한 관계를 동일하게 강조했다. 이들 각자에게 있어서 만찬은 본질상 징계를 받아 마땅한 자들의 참여를 금하는 것이었다. 휘브마이어는 “그리스도의 만찬을 위한 형식(A Form for Christ's Supper)”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지체들과 교제를 갖는다(고전 10:16).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제도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와 빵을 부순다. 영과 진리 안에서 내적 교통이 없이 외적으로 빵을 부수는 것은 단지 배반자 유다와 같은 가증한 위선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만찬이 가리키는 바는 정확히 이 사랑의 교제와 참여이다. 곧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빵을 부수고 포도주를 부음으로써 또한 각각 자신을 드리고 자신의 피를 다른 사람을 위하여 부어야 함을 영적으로 나타내고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만찬의 실행으로 사람들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장-17장).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 관하여 하신 모든 말씀이 이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물침례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공적 증거인 것 같이 만찬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공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스(Hans)와 레온하드(Leonhard)와의 대화에서 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시 말하건대, 만찬은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형제 사랑의 표시이다.” 그러나 휘브마이어에게 주님의 만찬은 이러한 교제를 상징하는 것 이상이었다. 주님의 만찬은 또한 십자가의 희생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영구히 기억나게 하는 교회에게 주어진 기념 예식이었다.
피터 리데먼(Peter Riedemann)은 1541년에 쓴 『변명서(Rechenschaft)』에서 마치 디다케(Didache)를 생각나게 하는 아름다운 문구로 주님의 만찬에 관해 기록했다. 빵은 곡식 낱알을 갈고 반죽하여 만들고, 포도주는 포도 열매를 한 알 한 알 으깨서 만든다. 곡식의 낱알과 포도송이의 한 알의 특성은 빵과 포도주를 위하여 포기되어진다. 이는 교회 안에서 주님과 나누는 제자의 교제를 상징하다. “따라서 식사나 주님의 빵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를 나타내는 것이며, 모든 지체가 각각 자신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과 영에 속한 자임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마르펙(Marpeck)에게 있어서 주님의 만찬은 교회의 징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교제의 표시였다.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하나됨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님의 만찬을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이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해 아나밥티스트들이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선행조건이 침례, 바른 행실, 모임에 속한 모든 형제들과의 형제 관계임을 분명하게 암시했다.
메노 시몬즈는 이미 1541년에『교회 징계에 관한 권면』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징계에 관한 교리를 제시하였다. 어느 면에서 이 교리는 아나밥티스트의 특성을 보여준다. 메노는 주님의 만찬과 교제에서 추방하는 조치조차도 반드시 사랑이 밑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조치는 반드시 마태복음 18장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 출교 조치를 내릴 경우 죄를 범한 형제나 자매와의 모든 불필요한 접촉이 금지된다. 남부 독일과 스위스 아나밥티스트들에게 이러한 메노의 입장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메노는 이러한 가르침이 단지 신약성경에 있는 사도들의 선례를 따랐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룩한 사도 바울이 가르치고 명령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나, .... 후에 거짓 교리에 빠지거나 헛되고 육신적 삶을 삶으로 그리스도의 몸과의 교제를 거부하고 떠난 자들과는 상관하지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 왜냐하면 그가 아버지든 어머니든, 자매이든 형제이든, 남편이든 아내이든, 딸이든 아들이든, 어떠한 자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그가 형제의 권면을 거부하면 그를 피하되,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며, 동정과 깊은 사랑의 영으로 그리하라.
메노는 자신의 입장에서 출교 조치를 취해야 할 죄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무력의 사용, 뮌스터파의 교회 왕국 개념에 동의, 일부다처, 벌거벗은 것과 같은 수치스러운 행동, 부도덕한 삶, “세속적인 설교를 들음, 유아세례, 속된 만찬, 온갖 가증한 것들, 술 취함, 탐욕, 간음, 우상숭배, 합당하지 않은 대화 등과 같은 악한 행위에 참여함”
메노는 혹자가 아나밥티스트들에 대해 마치 하나님처럼 형제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려고 한다고 비난할 것에 대비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바르게 이해하라. 우리는 거짓 교리나 바르지 못한 행실로 스스로 그리스도의 교제에서 분리되어 나간 형제들 외에는 어떠한 형제도 교제로부터 출교시키거나 단절시키지 않는다.”
메노는 교제의 단절이 일시적인 치료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메노는 형제들에게 참되게 회개한 자들과 항상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는 충고하기를 “거짓 교리나 헛된 삶을 사는 악에서 돌이켜서, 자신이 이미 침례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자는 형제들과의 교제에서 영구히 제외되거나 출교될 수 없다”고 했다.
메노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메노를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메노는 참된 아나밥티스트들과 “거짓 형제들”로 불린 자들을 구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이러한 거짓 형제들로는 뮌스터파(Munsterites), 바텐버거파(Batenbergers), 다비디안파(Davidians) 등과 같이 진리를 벗어난 분파들이었다. 디르크 필립스와 같은 지도자들은 메노가 주창한 엄격한 기준들을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에 분명하다. 이들 지도자들은 도처에서 이 모임 저 모임을 다니며 자신들의 교리로 오염시키는 자들로 인해 드러나 해(害)를 보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마도 이러한 출교의 실행이 맨 처음 출교가 등장했을 때처럼 엄격하고 가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출교의 실행으로 메노파들 가운데 신랄한 비난과 오해와 끝없는 분열을 낳았으며, 결국 대다수가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참 교회의 또 다른 빛나는 표인 거룩을 이루기 위해 첫 번째로 출교를 도입하였다. 그들은 거룩을 삶과 교리에서의 순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감사하는 기념 예식이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재림의 표일 뿐 아니라 교제이기도 하였다. 이 독특한 교제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이 제자들 안에 심겨졌기 때문이다. 휘브마이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내적인 기름부음을 통하여 신자 안에서 역사하셔서 원하게도 하고 행하게도 하신다(빌 2:13). 그러므로 누구든지 선이나 악을 원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 가운데 있다.”
휘브마이어와 스위스 형제단이 주님의 만찬이 기념하는 것이라는 쯔빙글리의 견해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일치했지만, 심각한 차이도 있었다. 첫째, 주님의 만찬은 침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휘브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그 관계를 강조했다. “물 침례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공적 증거인 것같이, 만찬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공적 증거이다.” 그러므로 만찬의 참여는 신앙공동체의 의무를 인식한 침례 받은 성도에게만 제한되었다. 둘째, 아나밥티스트 운동의 초기에 감옥에 갇혔던 아나밥티스들이 취한 증언에서 주님의 만찬은 사랑의 표시, 그리스도 안의 교제의 표시, 또는 교회를 함께 묶는 교통(communion)의 표시로 불렸다. 셋째, 1527년까지 주님의 만찬은 출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의 조항과 휘브마이어의 니콜스버그(Nikolsburg) 논문은 모두 만찬을 올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여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교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넷째, 비록 침례 및 만찬과 동일한 범주에 있지는 않을지라도 절제된 제자도(discipleship)는 프로테스탄트 및 카톨릭의 교구 교회와 현저히 구별 짓는 참 교회의 표가 되었다. 프란츠 하이만(Franz Heimann)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간파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은 항상 흠없이 순결하게 남아 있지만, 실제로 체험 안에 있는 지역 교회에는 불결한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다. 이러한 불결한 요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지체가 아니거나, 혹 외적으로는 회중에 속했지만 참된 지체인 적이 없었던 교회 회원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교회는 스스로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는 ”타락한“ 회원을 제거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회는 출교로서 이 일을 행한다.”
교회 행정에서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의 원리는 16세기의 아나밥티스트들 가운데 생겨났다. 휘브마이어와 그레벨은 1524년에 저술한 저서에서 이 개념을 언급했다. 휘브바이어는 1524년 6월에 이미 회중주의의 기원을 포함하는 18개 조항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들 조항은 후에 발트슈트(Waldshut)에서 실행되었다. 8번째 조항은 다음과 같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믿고 침례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빵과 포도주가 올바르게 주어졌을 때 거룩한 성경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각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교회의 신앙과 실행에 대해 개인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권리가 확인 되었을 뿐 아니라 회중이 사역자들을 지원해야할 책임도 강조되었다. “사역자들에게 음식과 옷을 공급하는 것은 사역자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받는 교회 지체들의 의무이다.”
유사하게 그레벨은 같은 해 9월에 뮌처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만약 당신이 받는 사례가 이자와 십일조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둘 다 고리대금으로서, 회중 전체가 당신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이 그러한 사례를 받지 않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당신은 목자(牧者)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레벨은 뮌처에게 교회의 결정은 “명령이나 강요가 아닌” 믿음과 사랑과 기도로 내려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회중주의적 규칙의 원리는 16세기 아나밥티스트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발트슈트(Waltshut)에서는 처음으로 기존 교회가 이전 신앙에서 아나밥티슴으로 옮긴 사례가 발생하였다. 리텔이 지적했듯이, 이 사건은 역사가에게 지극히 중요한 실례를 제공하는 것이다.
회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가시적 표시로서 믿음에 의한 침례를 받아들이자마자, 휘브마이어는 사제(司祭)의 자리를 사임하고 즉시 회중에 의해 사역자로 다시 선출되었다. 이 사건은 아나밥티스트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교회 행정이 회중주의적 원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시작점으로서 특징지어졌기 때문이다.
메노가 메노파의 교회 행정을 보다 중앙집권화 된 형태로 다시 조직할 때까지, 후터파를 제외하고 아나밥티스트의 자치적(autonomous) 회중 교회 가운데에는 어떠한 교파적 형태도 존재하지 않았다.
- William R. Estep 著 『The Anabaptist Story』5章 "Church and State" -
윌리암 에스텝
그 다음으로는 징계(discipline)가 참 교회의 세 번째 표가 되었다. 형제들은 삶과 행위에서 아나밥티스트의 온전한 증거를 유지하기 위해서 징계를 실행하였다. 아나밥티스트들이 크게 부흥하자 대적들은 그들이 무죄의 완전함을 가르친다고 비난했다. 휘브마이어는 이러한 비난을 단호히 거부했다. “우리가 침례 받은 후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유사한 말로 자랑한다고 하는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침례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변함없이 불쌍하고 가련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아나밥티스트들이 쓴 그리스도인의 삶의 거룩에 대한 글은 때로 그들의 주장이 죄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저자들은 주의해서 그러한 결론을 피했다. 디르크 필립스가 이 점에 관한 한 예가 된다. 침례 받은 신자로서 합당한 행위의 높은 표준에 대하여 디르크 필립스처럼 주장한 사람은 없다. 그는 의(義)의 삶을 추구하도록 신약과 구약에서 일련의 구절을 인용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은 반드시 매우 신중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과 같이 완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과 똑같이 이 세상에서 거룩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며, 사도 바울이 그랬듯이 오직 모든 열심으로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온갖 열심으로 거룩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현세(現世)의 삶에서 무죄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프로테스탄트 국가 교회의 부도덕성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인의 표준에 못 미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의 법령에 의한 종교 개혁은 사도들이 본(本)으로 제시했거나 신약성경이 가르친 삶의 특성을 이루지 못했다. 그레벨은 뮌처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제단과 스위스 개혁주의 사이의 문제 가운데 하나로 ‘열매 없는 믿음’을 열거했다. 일찍이 필그림 마르펙(Pilgram Marpeck)은 루터파의 종교개혁이 열성적인 루터파 사람들의 도덕 기준을 변화시키는데 실패한 것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루터파를 떠나 아나밥티스트로 가게 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그들 가운데 뚜렷하게 구별된 삶의 특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징계를 사용하였다. 공공연하게 드러난 모든 죄의 행위들은 반드시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징계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결코 무력에 호소하지는 않았다. 형제들에게 있어서 모든 교회의 실행을 뒷받침한 것은 사랑이었다. 징계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사랑보다 강조된 것은 없었다.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는 “때로 실족해서 오류와 죄에 빠진” 자들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그러한 자는 은밀하게 두 번 권면을 받아야 한다. 세 번째에는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공개적으로 징계를 주거나 출교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징계나 출교는 빵을 부수기 전에 성령님의 통제하심을 따라 실행하도록 하여(마 5장),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한 빵을 먹으며, 한 잔을 마시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만찬은 아나밥티스트 운동의 시작부터 징계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레벨은 만찬에 관해 뮌처를 훈계할 때 이 중요성을 강조했다. “만약 어떤 형제가 주의해서 형제다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경우, 그는 스스로 정죄를 먹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빵과 잔과 다른 음식과의 차이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는 내적 결합(bond)인 사랑과 외적 결합인 빵에 수치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레벨은 교회의 규례로서 주님의 만찬을 올바르게 준수해야 하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만찬은 미사나 성례전이 아니다. 그러므로 임종(臨終) 때나 그 밖의 어떠한 경우에도 혼자서 받을 수 없다. 빵은 개인을 위하여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개인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하나됨 안에 있는 자들의 빵을 취해서는 안 된다..----” 그레벨은 다른 주제를 언급하기 전에 주님의 만찬과 징계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찬은 반드시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규칙을 따라 지켜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주님의 만찬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8장이 없이는 모든 사람이 외적인 것에만 열중하고 내적인 것, 곧 사랑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휘브마이어와 리드만과 마르펙(Marpeck)도 징계와 주님의 만찬의 밀접한 관계를 동일하게 강조했다. 이들 각자에게 있어서 만찬은 본질상 징계를 받아 마땅한 자들의 참여를 금하는 것이었다. 휘브마이어는 “그리스도의 만찬을 위한 형식(A Form for Christ's Supper)”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지체들과 교제를 갖는다(고전 10:16).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제도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와 빵을 부순다. 영과 진리 안에서 내적 교통이 없이 외적으로 빵을 부수는 것은 단지 배반자 유다와 같은 가증한 위선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만찬이 가리키는 바는 정확히 이 사랑의 교제와 참여이다. 곧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빵을 부수고 포도주를 부음으로써 또한 각각 자신을 드리고 자신의 피를 다른 사람을 위하여 부어야 함을 영적으로 나타내고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만찬의 실행으로 사람들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장-17장).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 관하여 하신 모든 말씀이 이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물침례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공적 증거인 것 같이 만찬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공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스(Hans)와 레온하드(Leonhard)와의 대화에서 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시 말하건대, 만찬은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형제 사랑의 표시이다.” 그러나 휘브마이어에게 주님의 만찬은 이러한 교제를 상징하는 것 이상이었다. 주님의 만찬은 또한 십자가의 희생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영구히 기억나게 하는 교회에게 주어진 기념 예식이었다.
피터 리데먼(Peter Riedemann)은 1541년에 쓴 『변명서(Rechenschaft)』에서 마치 디다케(Didache)를 생각나게 하는 아름다운 문구로 주님의 만찬에 관해 기록했다. 빵은 곡식 낱알을 갈고 반죽하여 만들고, 포도주는 포도 열매를 한 알 한 알 으깨서 만든다. 곡식의 낱알과 포도송이의 한 알의 특성은 빵과 포도주를 위하여 포기되어진다. 이는 교회 안에서 주님과 나누는 제자의 교제를 상징하다. “따라서 식사나 주님의 빵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를 나타내는 것이며, 모든 지체가 각각 자신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과 영에 속한 자임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마르펙(Marpeck)에게 있어서 주님의 만찬은 교회의 징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교제의 표시였다.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하나됨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님의 만찬을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이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해 아나밥티스트들이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선행조건이 침례, 바른 행실, 모임에 속한 모든 형제들과의 형제 관계임을 분명하게 암시했다.
메노 시몬즈는 이미 1541년에『교회 징계에 관한 권면』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징계에 관한 교리를 제시하였다. 어느 면에서 이 교리는 아나밥티스트의 특성을 보여준다. 메노는 주님의 만찬과 교제에서 추방하는 조치조차도 반드시 사랑이 밑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조치는 반드시 마태복음 18장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 출교 조치를 내릴 경우 죄를 범한 형제나 자매와의 모든 불필요한 접촉이 금지된다. 남부 독일과 스위스 아나밥티스트들에게 이러한 메노의 입장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메노는 이러한 가르침이 단지 신약성경에 있는 사도들의 선례를 따랐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룩한 사도 바울이 가르치고 명령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나, .... 후에 거짓 교리에 빠지거나 헛되고 육신적 삶을 삶으로 그리스도의 몸과의 교제를 거부하고 떠난 자들과는 상관하지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 왜냐하면 그가 아버지든 어머니든, 자매이든 형제이든, 남편이든 아내이든, 딸이든 아들이든, 어떠한 자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그가 형제의 권면을 거부하면 그를 피하되,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며, 동정과 깊은 사랑의 영으로 그리하라.
메노는 자신의 입장에서 출교 조치를 취해야 할 죄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무력의 사용, 뮌스터파의 교회 왕국 개념에 동의, 일부다처, 벌거벗은 것과 같은 수치스러운 행동, 부도덕한 삶, “세속적인 설교를 들음, 유아세례, 속된 만찬, 온갖 가증한 것들, 술 취함, 탐욕, 간음, 우상숭배, 합당하지 않은 대화 등과 같은 악한 행위에 참여함”
메노는 혹자가 아나밥티스트들에 대해 마치 하나님처럼 형제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려고 한다고 비난할 것에 대비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바르게 이해하라. 우리는 거짓 교리나 바르지 못한 행실로 스스로 그리스도의 교제에서 분리되어 나간 형제들 외에는 어떠한 형제도 교제로부터 출교시키거나 단절시키지 않는다.”
메노는 교제의 단절이 일시적인 치료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메노는 형제들에게 참되게 회개한 자들과 항상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는 충고하기를 “거짓 교리나 헛된 삶을 사는 악에서 돌이켜서, 자신이 이미 침례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자는 형제들과의 교제에서 영구히 제외되거나 출교될 수 없다”고 했다.
메노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메노를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메노는 참된 아나밥티스트들과 “거짓 형제들”로 불린 자들을 구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이러한 거짓 형제들로는 뮌스터파(Munsterites), 바텐버거파(Batenbergers), 다비디안파(Davidians) 등과 같이 진리를 벗어난 분파들이었다. 디르크 필립스와 같은 지도자들은 메노가 주창한 엄격한 기준들을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에 분명하다. 이들 지도자들은 도처에서 이 모임 저 모임을 다니며 자신들의 교리로 오염시키는 자들로 인해 드러나 해(害)를 보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마도 이러한 출교의 실행이 맨 처음 출교가 등장했을 때처럼 엄격하고 가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출교의 실행으로 메노파들 가운데 신랄한 비난과 오해와 끝없는 분열을 낳았으며, 결국 대다수가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참 교회의 또 다른 빛나는 표인 거룩을 이루기 위해 첫 번째로 출교를 도입하였다. 그들은 거룩을 삶과 교리에서의 순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감사하는 기념 예식이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재림의 표일 뿐 아니라 교제이기도 하였다. 이 독특한 교제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이 제자들 안에 심겨졌기 때문이다. 휘브마이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내적인 기름부음을 통하여 신자 안에서 역사하셔서 원하게도 하고 행하게도 하신다(빌 2:13). 그러므로 누구든지 선이나 악을 원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 가운데 있다.”
휘브마이어와 스위스 형제단이 주님의 만찬이 기념하는 것이라는 쯔빙글리의 견해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일치했지만, 심각한 차이도 있었다. 첫째, 주님의 만찬은 침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휘브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그 관계를 강조했다. “물 침례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공적 증거인 것같이, 만찬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공적 증거이다.” 그러므로 만찬의 참여는 신앙공동체의 의무를 인식한 침례 받은 성도에게만 제한되었다. 둘째, 아나밥티스트 운동의 초기에 감옥에 갇혔던 아나밥티스들이 취한 증언에서 주님의 만찬은 사랑의 표시, 그리스도 안의 교제의 표시, 또는 교회를 함께 묶는 교통(communion)의 표시로 불렸다. 셋째, 1527년까지 주님의 만찬은 출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의 조항과 휘브마이어의 니콜스버그(Nikolsburg) 논문은 모두 만찬을 올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여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교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넷째, 비록 침례 및 만찬과 동일한 범주에 있지는 않을지라도 절제된 제자도(discipleship)는 프로테스탄트 및 카톨릭의 교구 교회와 현저히 구별 짓는 참 교회의 표가 되었다. 프란츠 하이만(Franz Heimann)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간파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은 항상 흠없이 순결하게 남아 있지만, 실제로 체험 안에 있는 지역 교회에는 불결한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다. 이러한 불결한 요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지체가 아니거나, 혹 외적으로는 회중에 속했지만 참된 지체인 적이 없었던 교회 회원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교회는 스스로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는 ”타락한“ 회원을 제거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회는 출교로서 이 일을 행한다.”
교회 행정에서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의 원리는 16세기의 아나밥티스트들 가운데 생겨났다. 휘브마이어와 그레벨은 1524년에 저술한 저서에서 이 개념을 언급했다. 휘브바이어는 1524년 6월에 이미 회중주의의 기원을 포함하는 18개 조항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들 조항은 후에 발트슈트(Waldshut)에서 실행되었다. 8번째 조항은 다음과 같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믿고 침례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빵과 포도주가 올바르게 주어졌을 때 거룩한 성경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각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교회의 신앙과 실행에 대해 개인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권리가 확인 되었을 뿐 아니라 회중이 사역자들을 지원해야할 책임도 강조되었다. “사역자들에게 음식과 옷을 공급하는 것은 사역자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받는 교회 지체들의 의무이다.”
유사하게 그레벨은 같은 해 9월에 뮌처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만약 당신이 받는 사례가 이자와 십일조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둘 다 고리대금으로서, 회중 전체가 당신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이 그러한 사례를 받지 않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당신은 목자(牧者)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레벨은 뮌처에게 교회의 결정은 “명령이나 강요가 아닌” 믿음과 사랑과 기도로 내려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회중주의적 규칙의 원리는 16세기 아나밥티스트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발트슈트(Waltshut)에서는 처음으로 기존 교회가 이전 신앙에서 아나밥티슴으로 옮긴 사례가 발생하였다. 리텔이 지적했듯이, 이 사건은 역사가에게 지극히 중요한 실례를 제공하는 것이다.
회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가시적 표시로서 믿음에 의한 침례를 받아들이자마자, 휘브마이어는 사제(司祭)의 자리를 사임하고 즉시 회중에 의해 사역자로 다시 선출되었다. 이 사건은 아나밥티스트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교회 행정이 회중주의적 원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시작점으로서 특징지어졌기 때문이다.
메노가 메노파의 교회 행정을 보다 중앙집권화 된 형태로 다시 조직할 때까지, 후터파를 제외하고 아나밥티스트의 자치적(autonomous) 회중 교회 가운데에는 어떠한 교파적 형태도 존재하지 않았다.
- William R. Estep 著 『The Anabaptist Story』5章 "Church and St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