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밥티스트의 역사 - 교회와 국가(2)
윌리암 에스텝
교회의 본질
아나밥티스트 운동은 초기 단계부터 여러 시대 동안 교회 안에 들어와 굳어진 부정한 것들을 베어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한 가지 시도가 신약성경에 계시된 대로 사도적 양식(樣式)을 엄격히 고수하는 것이었다. 개혁주의는 그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최초의 기초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레벨(Grebel)은 “우리의 조상들은 참된 하나님과, 참되고 보편적이고 신성한 말씀과 신성한 제도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삶을 버리고 인간적이고 무익하고 비기독교적인 관습과 의식(儀式) 안에서 하나님의 법과 복음 없이 살았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부언해서 “'복음적인 설교자'들도 오류 가운데 있다. 그들이 교황 반대자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설교는 신성한 말씀과 동일하지 않거나 조화를 이루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레벨은 누구든지 이러한 설교자들의 견해만을 읽고 듣는 한, 그는 계속해서 오류 가운데 있게 된다고 고백했다. 그는 “우리가 성경을 손에 쥔 후에야 개혁주의의 실패를 깨닫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뮌처(Muntzer)에게 “오직 순결하고 무오류한 성경에서 발견되어지는 것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권면했다. 그레벨의 입장은 16세기 아나밥티슴의 특성이었다.
만약 교회의 회복을 위한 다림줄(錘線)이 신약성경이었다면, 교회가 세워져야할 기초는 무엇이었는가? 비록 여러 가지 형태로 주장되었지만, 아나밥티스트들은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는데 동의했다. 그러므로 휘브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바울이 말했듯이, 이 놓여진 기초 위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나니,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다(고전 3:11)......교회는 이 믿음과 고백에 기초한 것이지 교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휘브마이어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만이 교회의 유일한 기초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 케리그마(Kerygma) -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었다.
영감주의자들과는 달리, 아나밥티스트들은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한 기초로서 새로운 계시를 원치 않았다. 옛 터 위에 성전을 다시 세우고자 돌아온 느헤미야와 같이, 아나밥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최초의 터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가시적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여겼다. 리데만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축하는 것과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 사이의 유사점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다시 한 번 성전을 세우셨다. 그 성전은 모든 가능한 것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첫 번째 돌과 기초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그 성전을 세워야 한다.”
다르크 필립스(Dirk Philips)도 동일한 유사성을 사용하여 아나밥티스트들이 새로운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터 위에 세운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메노를 강하게 사로잡은 구절로서, 그가 기록한 모든 글의 여백에서 항상 발견되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3:11이었다. “이 놓여진 기초 위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나니,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라.” 메노에게 교회의 존재는 오직 성육신의 사실 위에 있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교회와 관련한 자신들의 입장이 사도들의 입장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믿었다. 위대한 사명(The Great Commission)은 그들의 사명이었다. 그들은 말씀 선포와 침례와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로 모였다. 이 사도적 양식에 관한 견해는 그레벨에서 메노 시몬즈에 이르기까지 모든 아나밥티스트 저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발표되었다. 이 견해는 휘브마이어의 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났으며, 다르크 필립스의 사고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믿음과 진리 안에서, 바른 침례와, 성령의 권능과 하나됨에 의해 모든 민족을 불러내어 교회로 모였다(마 28:19,20)(막 16:15,16).”
아나밥티스트들은 유아세례나 행정관의 권력에 의한 강압적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와 같이 세워지는 교회는 거짓되며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선포된 복음에 대해 자유롭게 응답한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를 중요시했다. 그들은 오직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모임으로써 신약의 사도적 양식에 따라 가시적 교회를 형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휘브마이어는 『그리스도인의 침례에 관하여』라는 자신의 책에서 그 과정을 단계적으로 상세히 설명하였다. 휘브마이어에 따르면 참된 교회의 첫 번째 표는 다시 태어남(重生 : regeneration)이다. 다시 태어남은 반드시 교회 회원이 되는 것보다 먼저 일어나야 한다. 당연히 아나밥티스트의 사상에는 다시 태어남의 체험 없이는 성경적 침례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침례 없이 교회 회원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이가 가시적 교회에 등록하기 전에 그는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다시 태어남은 16세기 아나밥티스트의 작품들 가운데 수없이 언급되고 있다. 디르크 필립은 아나밥티스트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때부터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침례가 의미하는 바, 곧 육신 안에 있는 죄의 몸을 벗어 버림, 그리스도의 장사됨,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께 속한 새로운 존재로의 부활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믿음, 새로 태어남(新生), 진실로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 없이 외적 표적만으로는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이며(갈 5:6)(갈 6:15)(요 3:3), 또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연합되고 성령님의 참여자가 되는 것은 주로 이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롬 8:10). 그러므로 만약 침례 받은 사람이 믿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며, 내적으로 성령과 불로 침례 받지 않고, 죄에 대하여 죽지 않았으며, 의(義)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외적 침례만으로는 본질적으로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요 1:12)(마 3:11)(롬 6:1-2).
메노는 다시 태어남의 교리를 강조한 결과 “새로 태어남에 관한 신학자”라고 불렸다. 그는 회심의 근본적인 본질을 보이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태어남”, “새로 태어남”, “영적 부활”, “새 생명”, “두 번째 태어남”, “마음의 영적 할례”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메노가 언급한 다시 태어남은 회개, 믿음과 생명의 새로운 속성을 포함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사고와 삶의 방법에 극히 중대한 영향을 준다. 메노에게 다시 태어남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바는 명백한 것이었다.
메노에게 새로 태어남은 자신이 크게 수고하여 삶을 도덕적으로 개혁한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오스터반(Oosterbaan)이 보여주었듯이, “새로 태어남은 전 인격이 철저하게 새롭게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새로 태어남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새로 태어남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한 근본적인 존재의 변화이다.” 오스터반의 이러한 통찰은 메노가 1537년에 발행한 소책자 “새로 태어남(The New Birth)"에서 증명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쓰고 있는 이 다시 태어남은 약속을 가진 참회한 경건한 삶이 뒤따르는 것으로서, 오직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깨달으며 성령님을 통하여 믿음으로 마음에 받아들인 주님의 말씀에서 비롯될 수 있다.” 여기에 또한 말씀 선포와 들음과 믿음과 다시 태어남의 신성한 질서에 대한 로마서 10장의 반향(反響)과 암시가 있지 않는가?
가시적 교회의 두 번째 표는 침례(baptism)이다. 그러나 침례는 무질서하게 집행될 수 없다. 침례는 그 의미를 깨닫고 자원해서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만 베풀 수 있다. 키웨트(Kiwiet)가 기록하였듯이, 일체의 강요가 없이 자발적인 반응을 따르는 것이 “자유 교회의 주(主) 기둥이다.”
그러므로 침례는 아나밥티스트들에게 가시적 교회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 표현은 휘브마이어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리드만과 마르펙(Marpeck)에게서도 발견된다. 침례는 개인적 제자도와 단체적 제자도를 연결시킨다. 신자는 침례에 의하여 교회의 규율에 복종하게 된다. 신자의 침례가 없으며 가시적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침례는 순종하는 제자도의 최초의 행위이면서 또한 신자가 가시적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연합을 나타내는 불가결의 표시이기도 하다. 교회의 규율에 복종하는 것으로서의 침례의 의미는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Schleitheim Confession)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그분의 명령 안에서 걷는 자들과, 그리스도의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고 형제자매로 불렸으나, 때로 넘어져서 오류와 죄 가운데 빠져서 부주의하게 과오를 범한 이들에게는 징계가 내려져야 한다.
- William R. Estep 著 『The Anabaptist Story』5章 "Church and State" -
윌리암 에스텝
교회의 본질
아나밥티스트 운동은 초기 단계부터 여러 시대 동안 교회 안에 들어와 굳어진 부정한 것들을 베어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한 가지 시도가 신약성경에 계시된 대로 사도적 양식(樣式)을 엄격히 고수하는 것이었다. 개혁주의는 그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최초의 기초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레벨(Grebel)은 “우리의 조상들은 참된 하나님과, 참되고 보편적이고 신성한 말씀과 신성한 제도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삶을 버리고 인간적이고 무익하고 비기독교적인 관습과 의식(儀式) 안에서 하나님의 법과 복음 없이 살았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부언해서 “'복음적인 설교자'들도 오류 가운데 있다. 그들이 교황 반대자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설교는 신성한 말씀과 동일하지 않거나 조화를 이루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레벨은 누구든지 이러한 설교자들의 견해만을 읽고 듣는 한, 그는 계속해서 오류 가운데 있게 된다고 고백했다. 그는 “우리가 성경을 손에 쥔 후에야 개혁주의의 실패를 깨닫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뮌처(Muntzer)에게 “오직 순결하고 무오류한 성경에서 발견되어지는 것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권면했다. 그레벨의 입장은 16세기 아나밥티슴의 특성이었다.
만약 교회의 회복을 위한 다림줄(錘線)이 신약성경이었다면, 교회가 세워져야할 기초는 무엇이었는가? 비록 여러 가지 형태로 주장되었지만, 아나밥티스트들은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는데 동의했다. 그러므로 휘브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바울이 말했듯이, 이 놓여진 기초 위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나니,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다(고전 3:11)......교회는 이 믿음과 고백에 기초한 것이지 교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휘브마이어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만이 교회의 유일한 기초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 케리그마(Kerygma) -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었다.
영감주의자들과는 달리, 아나밥티스트들은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한 기초로서 새로운 계시를 원치 않았다. 옛 터 위에 성전을 다시 세우고자 돌아온 느헤미야와 같이, 아나밥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최초의 터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가시적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여겼다. 리데만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축하는 것과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 사이의 유사점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다시 한 번 성전을 세우셨다. 그 성전은 모든 가능한 것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첫 번째 돌과 기초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그 성전을 세워야 한다.”
다르크 필립스(Dirk Philips)도 동일한 유사성을 사용하여 아나밥티스트들이 새로운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터 위에 세운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메노를 강하게 사로잡은 구절로서, 그가 기록한 모든 글의 여백에서 항상 발견되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3:11이었다. “이 놓여진 기초 위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나니,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라.” 메노에게 교회의 존재는 오직 성육신의 사실 위에 있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교회와 관련한 자신들의 입장이 사도들의 입장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믿었다. 위대한 사명(The Great Commission)은 그들의 사명이었다. 그들은 말씀 선포와 침례와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로 모였다. 이 사도적 양식에 관한 견해는 그레벨에서 메노 시몬즈에 이르기까지 모든 아나밥티스트 저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발표되었다. 이 견해는 휘브마이어의 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났으며, 다르크 필립스의 사고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믿음과 진리 안에서, 바른 침례와, 성령의 권능과 하나됨에 의해 모든 민족을 불러내어 교회로 모였다(마 28:19,20)(막 16:15,16).”
아나밥티스트들은 유아세례나 행정관의 권력에 의한 강압적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와 같이 세워지는 교회는 거짓되며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선포된 복음에 대해 자유롭게 응답한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를 중요시했다. 그들은 오직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모임으로써 신약의 사도적 양식에 따라 가시적 교회를 형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휘브마이어는 『그리스도인의 침례에 관하여』라는 자신의 책에서 그 과정을 단계적으로 상세히 설명하였다. 휘브마이어에 따르면 참된 교회의 첫 번째 표는 다시 태어남(重生 : regeneration)이다. 다시 태어남은 반드시 교회 회원이 되는 것보다 먼저 일어나야 한다. 당연히 아나밥티스트의 사상에는 다시 태어남의 체험 없이는 성경적 침례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침례 없이 교회 회원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이가 가시적 교회에 등록하기 전에 그는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다시 태어남은 16세기 아나밥티스트의 작품들 가운데 수없이 언급되고 있다. 디르크 필립은 아나밥티스트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때부터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침례가 의미하는 바, 곧 육신 안에 있는 죄의 몸을 벗어 버림, 그리스도의 장사됨,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께 속한 새로운 존재로의 부활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믿음, 새로 태어남(新生), 진실로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 없이 외적 표적만으로는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이며(갈 5:6)(갈 6:15)(요 3:3), 또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연합되고 성령님의 참여자가 되는 것은 주로 이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롬 8:10). 그러므로 만약 침례 받은 사람이 믿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며, 내적으로 성령과 불로 침례 받지 않고, 죄에 대하여 죽지 않았으며, 의(義)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외적 침례만으로는 본질적으로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요 1:12)(마 3:11)(롬 6:1-2).
메노는 다시 태어남의 교리를 강조한 결과 “새로 태어남에 관한 신학자”라고 불렸다. 그는 회심의 근본적인 본질을 보이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태어남”, “새로 태어남”, “영적 부활”, “새 생명”, “두 번째 태어남”, “마음의 영적 할례”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메노가 언급한 다시 태어남은 회개, 믿음과 생명의 새로운 속성을 포함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사고와 삶의 방법에 극히 중대한 영향을 준다. 메노에게 다시 태어남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바는 명백한 것이었다.
메노에게 새로 태어남은 자신이 크게 수고하여 삶을 도덕적으로 개혁한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오스터반(Oosterbaan)이 보여주었듯이, “새로 태어남은 전 인격이 철저하게 새롭게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새로 태어남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새로 태어남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한 근본적인 존재의 변화이다.” 오스터반의 이러한 통찰은 메노가 1537년에 발행한 소책자 “새로 태어남(The New Birth)"에서 증명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쓰고 있는 이 다시 태어남은 약속을 가진 참회한 경건한 삶이 뒤따르는 것으로서, 오직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깨달으며 성령님을 통하여 믿음으로 마음에 받아들인 주님의 말씀에서 비롯될 수 있다.” 여기에 또한 말씀 선포와 들음과 믿음과 다시 태어남의 신성한 질서에 대한 로마서 10장의 반향(反響)과 암시가 있지 않는가?
가시적 교회의 두 번째 표는 침례(baptism)이다. 그러나 침례는 무질서하게 집행될 수 없다. 침례는 그 의미를 깨닫고 자원해서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만 베풀 수 있다. 키웨트(Kiwiet)가 기록하였듯이, 일체의 강요가 없이 자발적인 반응을 따르는 것이 “자유 교회의 주(主) 기둥이다.”
그러므로 침례는 아나밥티스트들에게 가시적 교회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 표현은 휘브마이어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리드만과 마르펙(Marpeck)에게서도 발견된다. 침례는 개인적 제자도와 단체적 제자도를 연결시킨다. 신자는 침례에 의하여 교회의 규율에 복종하게 된다. 신자의 침례가 없으며 가시적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침례는 순종하는 제자도의 최초의 행위이면서 또한 신자가 가시적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연합을 나타내는 불가결의 표시이기도 하다. 교회의 규율에 복종하는 것으로서의 침례의 의미는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Schleitheim Confession)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그분의 명령 안에서 걷는 자들과, 그리스도의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고 형제자매로 불렸으나, 때로 넘어져서 오류와 죄 가운데 빠져서 부주의하게 과오를 범한 이들에게는 징계가 내려져야 한다.
- William R. Estep 著 『The Anabaptist Story』5章 "Church and St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