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적 아나뱁티스트의 입장에서 본 교회와 국가
이 책은 개혁적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를 대변하는 존 레데콥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에 대해 구체적인 원리와 지침을 알려주는 책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교회에서 정치나 국가에 대해 성경적 가르침을 거의 받지 못했다. 단편적으로 교회와 성도는 정부와 정치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만 배웠다. 그리고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만 배웠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들이 유신을 반대하고, 정치적 이유로 감옥에 갔어도, 그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성경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그 근거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22:21, 막12:17, 눅20:25)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는 것인지, 바치지 말라는 것인지, 혹은 인간 왕과 하나님께 동시에 바치라는 것인지 알송달송하다. 분명한 것은, 문맥(context)을 따라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연 성경은 종교와 정치에 대해, 혹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 항상 궁금했다. 레데콥의 <기독교 정치학>은 이런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신선한 통찰력을 주었다.
저자가 밝혔듯,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가 일종의 대안사회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국가는 비록 하나님의 의해 설립되었어도, 비기독교인들 내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존재한다.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직무를 맡아서는 안 되며, 평화에 대한 강한 강조 때문에 군 복무까지 거부했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철저한 분리를 원칙으로 스스로 “땅에서 조용한 자들”이 되고, “타협없는 기독교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존 레데콥은 아나뱁티스트에 속해 있지만, 개혁적 아나뱁티스트로서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를 주장한다. 그는 자기 책의 입장은 “아나뱁티스트적 현실주의”(Anabaptist realism)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입장은 이 책의 영문판 제목이 잘 보여준다., 즉 세상 정치도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 저자가 성경에서 교회와 국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지 연구하여 정리한 것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교회와 국가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고,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표현이다. 비록 타락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반항의 길을 갔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치구조를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확대하셨다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두 영역에서 살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는 시민으로, 교회 영역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 아나뱁티스트의 기본입장은 루터나 캘빈처럼 두 개의 윤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궁극적으로 오직 한 가지 윤리만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순종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백성과 인간 조직에 미친다고 선포해야 한다. 이는 기독교인은 정치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기독교적 관심을 표명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 책 곳곳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중하게 정치에 참여할 것인지 논하고 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이 정부에 요구하는 핵심사항들을 20가지로 정리한다. 그리고 6장에서는 하나님이 기독시민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10가지로 제시한다. 그리고 10장에서는 기독교 정당의 존재에 대해, 11장에서는 시민불복종의 성서적 토대에 대해, 12장에서는 정치가와 정부를 위한 기독교인의 기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레더콥의 논지는 명쾌하다.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지 말고, 정치와 정부에 대해 균형잡힌 견해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신중히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세금을 내든 내지 않든지, 투표를 하든 투표를 하지 않든지, 현정부에 찬성하든 찬성하지 않든지, 다 정치적인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호와 증인들이 ‘병역 거부’를 한 것에 대해 무조건 맹신적인 이단의 모습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비록 이단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절대적 평화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신앙의 양심으로 병역을 거부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레데콥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그리스의 제자이며 동시에 한 나라의 시민이다. 병역거부는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거부했기에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교회와 국가, 혹은 종교와 정치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있다면 편협되게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일 때 기독교 모임에서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던 사건이 생각났다. 얼마 전에는 기독교 조찬기도회에서 무릎을 꿇어 구설수에 올랐다. 그가 고백한 것과 보여준 모습은 기독교인으로서는 그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부의 수장이다. 그렇다면, 정부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해야지, 교회를 통해 그 일을 이루거나 반대로 정권으로 교회를 옹호하거나 복음을 전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레더콥의 입장임이 분명하다.
저자는 책 마지막에 정부와 정치에 대한 160개의 성서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 좀 더 진지하게 성경말씀에 근거해 국가와 교회에 대해 연구하고 성찰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동시에 한 나라의 시민으로, 교회와 국가에 대해 올바로 생각하고 그 의무와 권리를 다해야 한다.
이 책은 개혁적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를 대변하는 존 레데콥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에 대해 구체적인 원리와 지침을 알려주는 책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교회에서 정치나 국가에 대해 성경적 가르침을 거의 받지 못했다. 단편적으로 교회와 성도는 정부와 정치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만 배웠다. 그리고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만 배웠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들이 유신을 반대하고, 정치적 이유로 감옥에 갔어도, 그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성경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그 근거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22:21, 막12:17, 눅20:25)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는 것인지, 바치지 말라는 것인지, 혹은 인간 왕과 하나님께 동시에 바치라는 것인지 알송달송하다. 분명한 것은, 문맥(context)을 따라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연 성경은 종교와 정치에 대해, 혹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 항상 궁금했다. 레데콥의 <기독교 정치학>은 이런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신선한 통찰력을 주었다.
저자가 밝혔듯,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가 일종의 대안사회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국가는 비록 하나님의 의해 설립되었어도, 비기독교인들 내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존재한다.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직무를 맡아서는 안 되며, 평화에 대한 강한 강조 때문에 군 복무까지 거부했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철저한 분리를 원칙으로 스스로 “땅에서 조용한 자들”이 되고, “타협없는 기독교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존 레데콥은 아나뱁티스트에 속해 있지만, 개혁적 아나뱁티스트로서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를 주장한다. 그는 자기 책의 입장은 “아나뱁티스트적 현실주의”(Anabaptist realism)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입장은 이 책의 영문판 제목이 잘 보여준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두 영역에서 살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는 시민으로, 교회 영역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 아나뱁티스트의 기본입장은 루터나 캘빈처럼 두 개의 윤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궁극적으로 오직 한 가지 윤리만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순종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백성과 인간 조직에 미친다고 선포해야 한다. 이는 기독교인은 정치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기독교적 관심을 표명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 책 곳곳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중하게 정치에 참여할 것인지 논하고 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이 정부에 요구하는 핵심사항들을 20가지로 정리한다. 그리고 6장에서는 하나님이 기독시민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10가지로 제시한다. 그리고 10장에서는 기독교 정당의 존재에 대해, 11장에서는 시민불복종의 성서적 토대에 대해, 12장에서는 정치가와 정부를 위한 기독교인의 기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레더콥의 논지는 명쾌하다.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지 말고, 정치와 정부에 대해 균형잡힌 견해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신중히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세금을 내든 내지 않든지, 투표를 하든 투표를 하지 않든지, 현정부에 찬성하든 찬성하지 않든지, 다 정치적인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호와 증인들이 ‘병역 거부’를 한 것에 대해 무조건 맹신적인 이단의 모습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비록 이단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절대적 평화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신앙의 양심으로 병역을 거부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레데콥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그리스의 제자이며 동시에 한 나라의 시민이다. 병역거부는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거부했기에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교회와 국가, 혹은 종교와 정치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있다면 편협되게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일 때 기독교 모임에서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던 사건이 생각났다. 얼마 전에는 기독교 조찬기도회에서 무릎을 꿇어 구설수에 올랐다. 그가 고백한 것과 보여준 모습은 기독교인으로서는 그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부의 수장이다. 그렇다면, 정부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해야지, 교회를 통해 그 일을 이루거나 반대로 정권으로 교회를 옹호하거나 복음을 전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레더콥의 입장임이 분명하다.
저자는 책 마지막에 정부와 정치에 대한 160개의 성서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 좀 더 진지하게 성경말씀에 근거해 국가와 교회에 대해 연구하고 성찰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동시에 한 나라의 시민으로, 교회와 국가에 대해 올바로 생각하고 그 의무와 권리를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