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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나뱁티스트 전통에서의 성서해석 
2. 스스로 해석하는 성서 
3. 그리스도 중심론과 두 개의 언약 
4.성령과 말씀
5. 공동의 성서해석과  순종의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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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론

아나뱁티스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도전에 반응하지 못하게 하는, 성서의 일반적인 흐름에 의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성서는 명확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는 확신은 예수의 말씀과 삶을 포함하는 본문에 전반적으로 적용되었다. 또 다른 아나뱁티스트들의 해석적 접근의 특징 중 하나는 그리스도 중심론과 두 개의 언약 개념이다. 
그리스도 중심론의 해석학의 전통
아나뱁티스트들의 글은 해석학에서 그리스도 중심론에 전적으로 헌신한 모습을 드러낸다. 예수께서 과거 모호했던 것을 명확하게 하셨다는 확신은 글들 속에서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확신은 아나뱁티스트들이 후브마이어가 자신 있게 말한 ‘밝고 명확한’ 본문이라고 일컫는 것이 예수의 말씀이라고 여기도록 했고, 다른 본문을 이해하는 기초로서 이해되게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종종 예수의 말씀과 씨름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려고 오히려 다른 본문들을 사용하곤 했다. 
자틀러의 성서해석의 표준원리는 그리스도의 말과 삶 모두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완전성이었다. 남부 독일 아나뱁티스트들 사이에서는, 예수가 분명하게 말씀하신 명령보다 그의 삶의 본과 전반적인 가르침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뎅크는 구약성서의 가르침과 본이 아니라, 예수의 삶의 본을 결정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이것은 모세, 다윗,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며 가르침이다. 그러나 사랑이신 예수의 관점에서 오랜 시간 ‘좋은 것’으로 있었던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으로 그들(구약의 가르침들)을 능가하게 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더 나은 가르침 때문에 덜 좋은(악한)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뮌스터의 재앙 뒤에, 메노는 로트만이 채택했던 세대주의적 접근을 거절하고 그가 쓴 모든 글의 처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제자들이 공개적으로 가르친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나, 확실하지 않은 것에서 나온 의심스러운 역사와 모호한 본문이 아닌, 바로 이것, 즉 예수의 의도에 순응해야 한다.” 후브마이어처럼, 메노도 예수의 ‘말씀과 삶’이 다른 본문과 비교해 볼 때, 바르다는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 그는 어떤 본문들을 쓰레기더미로 취급하는 위험을 감수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중심론과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의 명확성과 단순성에 대한 헌신 사이의 연결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더크 필립스는 “유일한 기준과 잣대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구약성서 전부는 “예수를 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 삶, 그리고 본이 우리의 선생이며, 지도자이자, 안내자이기에 우리는 반드시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따라야 한다”라고 결론을 지었다. 구약성서과 신약성서를 비교하면서 리드만은 “아버지의 진정한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진리의 빛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모세에 의해서 율법이 주어졌지만, 예수에 의해 진리가 왔다”고 결론짓는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께 귀를 기울임으로 발견될 수 있는 것이지, 구약성서의 ‘그림자’를 통해서가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일부 세대주의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그리스도 중심론적 접근에도 쉽사리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 중심론은 종말론적 본문이 중심위치를 차지함에 따라 유지되기 어려웠다. 뮌스터에서 그리스도 중심론은 폐기되고, 구약에 초점을 둔 것과 예수와 신약을 간과한 방법이 표준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시도는 위험스런 결과를 낳는다. 전부 학살이 된 뮌스터공동체에도 그렇고, 똑같이 위험하다고 간주된 전체 아나뱁티스트 운동에도 그러했다. 이 사건은 메노와 다른 네덜란드 지도자들은 데이비드 조리스의  종말론적 접근에 저항했으며, 철저하게 그리스도중심적이 되려고 노력했다. 이후로 종말론적 해석은 쇠퇴되어 갔고, 그리스도 중심론이 표준이 되어갔다.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학의 함축적 의미
(1)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에게 그리스도중심성은 성서는 평면적인 책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본문은 그 내용의 가르침과 실천에서 다른 본문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약은 구약보다 앞서며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특별히 예수의 가르침과 삶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절정을 이루므로 성서해석의 모든 질문에 대한 제일 중요한 답이 된다. 월터 클라센은 아나뱁티스트들이 성서 안에서 권위의 순서를 매겨놓았다고 비난했다지만 대부분 아나뱁티스트들은 성서의 영감과 권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 관해 덜 중요한 본문으로 보았다. 이런 본문도 진실하며 신뢰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적용하는 데 있어서 제한적이라는 뜻이며, 혹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중요성은 교회론의 관점에서 측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비록 종말론적 그룹과 같은 예외들이 있긴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본에서 시작했고, 다른 본문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했고, 이것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서 이해했다. 종교개혁자들과 일치하지 않은 부분들이 생긴 이유가 바로 이런 과정의 결과이다.
(2) 그리스도 중심론이란 모든 성서가 예수를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의 약속 성취로서 그의 길을 예비하였고 그를 향하고 있다. 만약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면 신약은 예수를 교회의 기초요 머리로서, 삶의 원천이며, 능력, 그리고 모든 면에서 따라야 할 우리의 본으로 예수를 보게 한다.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자들에게 적용하는 차원에서 구약보다 신약을 더 우위에 두고 있으며, 그뿐만 아니라 신약 안에서도 복음서를 다른 책보다 더 높은 서열을 매김으로써 차이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예수의 말씀과 삶의 본을 포함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가르침은 반드시 예수의 가르침과 조화되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 반대로 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모든 본문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성서가 정확하게 예수가 말씀하시고 행한 것과 비교되면서 이해될 필요는 없지만, 이 모든 본문 속에서 예수에 대한 이해가 증가되며 제자도가 계발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3) 필그림 마펙에게 있어서, 특별히 그리스도 중심론은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 그리고 성서의 권위 있는 해석자로서 인정되고 존경을 받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아주 중요한 방침이었다. 아나뱁티즘은 삶의 모든 면에서 예수에게 최고의 자리를 드리려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깊은 갈망을 나타내 보였다.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배움과 이성에 대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염려 중의 하나는 그러한 인간의 노력에 대한 의존이 이론에서뿐 아니라 실제에서도 예수를 보좌에서 내려가게 했다는 것이었다. 예수은 그의 제자들에게 여전히 적용해야 할 본문과 적용하지 않아도 되는 본문 사이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지혜로운 해석자였다.
(4) 그리스도 중심론은 교리로서의 예수보다 역사적인 예수를 더 강조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교리 속의 예수를 인정했으나 복음서의 예수에게 더 매료되었다. 그들은 구원의 유일한 기초로서 예수의 구원 사역을 믿는 믿음을 종교개혁자들과 공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실천함으로 그들의 주와 주인이 되신 예수를 따르기로 다짐했다. 메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믿음의 필수적인 대상이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델이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는 예수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대체물이다. 예수는 주님이시며, 모든 교회의 머리이시다. 메노는 그리스도를 신약성서의 모범을 따르는 교회로 회복시키시는 분으로 바라보았다.”
(5) 그리스도 중심론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문자적인 그리고 율법적인 적용이 아니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예수의 삶의 모범, 삶의 방식, 영성, 관계성 그리고 의도를 다른 성서 본문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기초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진심으로 피하려고 했던 것은 예수의 명령을 예외적인 것과 한계설정이 되어 있는 것처럼 일반화하여 축소함으로 예수의 권위를 희석하는 것이었다. 
(6) 그리스도 중심론은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이 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말이었다. 단지 역사적인 예수가 성서본문의 중심일 뿐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해석자의 삶의 경험 속에서도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성서의 해석과 적용을 객관적인 예수의 명확한 가르침과 삶의 모범, 그리고 그들의 개인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신앙에 근거했다.
아나뱁티즘-그리스도중심적인 운동
해석학에서 그리스도 중심론적 접근은 따로 외떨어진 현상이 아니다. 아나뱁티스트 신학과 교회론과 윤리, 찬송연구와 영성의 중심에 예수가 있다. 이 그리스도 중심론은 기독론의 혁신이 가져온 결과가 아니었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론은 예수가 그들의 구원에서 중심일 뿐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심으로 그들의 삶에서도 중심이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는 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었으며 그들이 닮아야 할 모델이었으며, 그들이 순종해야 할 주인이며, 그들이 당면한 전쟁에서 그들과 함께 싸워주시는 대장이기도 하셨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성서를 해석하기 위한 조화로운 시스템을 계발하면서 중심 개념을 찾는 데 관심이 없었다. 단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가장 명확하게 발견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어떤 아나뱁티스트 사람들은 성서주의라고 비난을 받아야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성서 자체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중요시되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예수의 권위가 타협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나뱁티스트 해석학의 그리스도 중심성은 그리스도 중심성이 신약에 우선순위를 둔 헌신에서 나왔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중심성이 신약에 우선순위를 두게 만든 헌신의 근거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아 보인다. 메노는 “예수의 쉬운 말씀과 명령, 가르침과 흠 없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관습을 따르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전통과 교회교부들의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고 몰아갈 때, 아나뱁티스트들의 염려는 교회는 타락했고, ‘거짓되었다’라는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삶을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표준으로 삼는 것에 만족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초대교회와 사도 리더십이 타협 없이 예수그리스도께 충분히 굴복되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아나뱁티스트들은 예수의 삶을 다루는 일차적인 자료로서 복음서에 우선권을 주면서, 다른 신약성서의 책들을 쓰거나, 그 책의 전달자들인 사도들을 예수의 가르침의 신실한 상속자라고 느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신약은, 그들이 가진 예수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구약보다는 더 큰 권위를 가졌다. 구약과 신약을 다루는 아나뱁티스트들의 방법은 그들의 근본적인 그리스도 중심성의 확대에서 나왔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예수에 대해 말하고 쓰는 방식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고통과 관심사에서 예수와 두드러진 유사성을 느꼈다는 것이 명백하다.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은 그들의 삶과 정황 속에서 예수와 더 깊은 관계성을 깨달았고, 그들은 예수를 성서에서 소외시키는 일을 하기보다는 이 그리스도 중심성으로 다른 성서를 읽어나가기로 더욱 굳게 다짐했다. 
‘그리스도 중심적' 혹은 '기독론적’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은 명시적으로나 내재적으로나 ‘기독론적’이라고 쉽게 묘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하나님의 최상, 최고의 계시가 되시며, 그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행동이 되신다. 성서적 메시지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구원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열려 있다는 말씀이다. 모든 성서는 이 중심적 진리를 증언하고 있다. 아나뱁티스트들도 이 사실에 대해 마음에서 동의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예수 자체는 덜 강조하고, 그의 구원에 관한 행동과 이신칭의 교리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의 해석학은 ‘구원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에 관한 그들의 이해는 성서에 대한 해석학적 열쇠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 해석학은 단지 기독론적이지만은 않았다. 예수의 구원 사역의 효력을 묘사하는 교리 대신 예수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중심적이었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들의 구세주일 뿐 아니라 그들이 본받아야 하는 삶의 모델이었으며, 그들이 마땅히 배워야 하는 선생님이기도 하셨다. 그들의 예수 중심성은 종교개혁자들의 기독론적 접근보다 인간 예수와 조금 더 단단히 묶여 있다. 그리고 그들의 나머지 다른 성서에 대한 해석도 종교개혁자들의 해석학과는 구분되면서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았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있어, 루터의 접근은 기독론적이지만 그리스도중심적이지는 않았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불명예스럽게 한다고 느꼈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예수를 사람으로 보는 시각을 잃었다고 두려워했으며, 단지 신학적인 원리만이 남았다고 느꼈다. 
이 주제에 대한 아나뱁티스트들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요약정리해 보자: 

●그의 구원사역에 기초를 둔 교리가 아니라 인간 예수를 강조 
●역사적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 
●예수에서 시작하려는 의지와 더불어 종교개혁자들이 받아들였던 것보다 더 많은 종류의 주제에 예수의 행동과 말씀이 표준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의지
●전체 성서를 수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중심론의 원리를 확대함
● 모든 해석자의 필수조건으로 살아계신 예수와의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 
●이 필수요건은 어떤 교육의 양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해석접근은 구원이 이끄는 새로운 삶과 그것의 공식 안에서 경험적이며 윤리적인 삶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기독론과는 다르며, 오히려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철저하게 기독론적이다.
비판과 평가 
종교개혁자들은 아나뱁티스트들이 예수의 매력과 예수를 닮고 따라야겠다는 도전을 수용한 결과로 열심을 냈다고 보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이신칭의의 개혁적인 교리를 향한 열심과 예수의 삶에 기반을 둔 제자도의 삶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중심성과 관련된 적지 않은 잘못으로 비난받았다. 예수를 순진하게 그대로 따르려고 하는 문자주의로 이해했으며, 자신을 희생함으로 율법 굴레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예수를 유일한 구세주를 보지 못한 채, 또 다른 새로운 율법을 부과한 자로 이해하고는 율법주의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수의 구체적인 명령을 강조하기보다는 사랑과 믿음과 같은 일반적인 원리를 장려하는 것을 선호했다. 일부 아나뱁티스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있어서 문자주의와 율법주의로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성서해석은 종종 이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었다. 대부분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제안했던 일반화에 머무르는 것을 별로 내키지 않아 했다. 
게다가, 종교개혁자들은 구주로서가 아닌, 삶의 본으로서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 ‘오직 은혜’의 급진적인 원리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며, 행위로 얻게되는 의로움으로 다시 역행하게 만들었다고 의심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자신들이 다시 행위로 받는 의로움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균형적이지 못한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그들은 가톨릭의 ‘믿음 없는 행위’가 개신교에 의해서 ‘행위 없는 믿음’으로 대체되었다고 느꼈다. 그들이 예수를 구세주일 뿐 아니라 선생이요 본으로 바라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또한 너무 많은 강조를 인간 예수에 두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는 강조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았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소홀히 한 기독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측면에는 덜 헌신했다는 부당한 인상을 주게 된 것이다. 
일부 아나뱁티스트들이 인정한 또 다른 문제는 만약 성서가 율법에 관한 책으로 다루어 지지 않고, 해석자들에 의해 ‘예수의 의도’를 찾으려는 자료로서 다루어진다면, 주관성에 대한 비난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아나뱁티스트들이 성서를 율법 책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그런 주관성의 위험이 적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의 글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과 의지와 마음에 대한 참고문헌들 속엔 잠재적인 많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시사한다.
다른 비판은 그리스도중심성이 복음서중심성과 함께 혼란스러워지는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우선순위를 복음서에 두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왜곡된 관점으로 갈 수도 있고, 성서의 다른 책들이 제공하는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엄격한 복음서중심성은 성령이 계속하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가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는 예수의 약속조차 무시하게 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복음서가 저자들과 독자들의 의식과 관심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복음서들을 간단하게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내용으로 간주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또한 예수의 말씀을 골라듣는 선택성에 대해 비판을 자초해 왔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전제에 가장 자연스러이 맞는 말들에 귀 기울였으며, 그들만의 확신을 지지했다.” 만약 다른 원리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자기해석의 위험으로 인해 아마 그리스도중심적 해석은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예수를 성서해석의 가장 위대한 권위자로 보는 것과 해석학의 기초를 예수의 해석에 두고자 했던 칭찬할 만한 열정은 예수의 방법론이 미래의 모든 해석자들까지 염두에 두면서 고안된 것인가를 고려하지는 못했다. 예수는 가능한 구약을 그의 문화 안에서 적절한 방법으로 사용하려 했고 새로운 요소를 소개했지만 랍비들의 전통을 여전히 따랐다. 어떤 비판은 아나뱁티즘 운동 자체에서 나온다. 후브마이어는 예수가 믿는 자들의 모델로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질문했다. 그가 유일한 구세주이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예수와 얼마나 다르며, 또 다르게 행동했는가?  
아나뱁티스트들은 구원론에서 그러하듯이 윤리에서도 그리스도가 권위자임을 주장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새로운 대안을 찾는 법을 피하면서 높은 윤리의식과 높은 기독론이 서로 함께 할 때만이 이 두 가지 모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자들이 비난한 것과 달리, 아나뱁티스트들은 윤리를 위해서 기독론에 대해 타협하지 않았고, 삶에서는 급진적으로 예수 중심적이면서, 실제로는 종교개혁자들보다 더 높고 완성된 기독론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두 개의 언약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관계를 다소 단순하게 보는 관점은 두 개의 반대되는 양극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의해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아나뱁티스트 해석학의 접근은 종교개혁자들의 접근보다는 불연속성에 훨씬 더 가깝게 놓여 있다. 아나뱁티스트 해석학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관한 주제가 종교개혁자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더 많이 강화시켰다. 
세속의 권력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인 시 정부의 관료였던 후브마이어가 이 주제에 대해 가졌던 관점은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 해석학보다는 종교개혁자들의 관점에 더 가까웠다. 그는 두 성서의 불연속성에 무게를 별로 두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아나뱁티스트들과 똑같은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마치 구약과 신약이 똑같은 권위를 가지는 것처럼, 구약을 사용함으로 신약의 내용이 타협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츠빙글리의 『세례(침례)』라는 책과의 대화 속에서, 츠빙글리가 두 성서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지막 심판을 상기하면서, 구약성서에서 나온 할례에 대한 왜곡된 토론을 중단하시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믿는 사람에게 세례(침례)를 주는 것에 대한 확실한 말씀의 근거를 가지고 있소. 당신들은 구약에서 나온 약간의 그림자들만을 근거도 없이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어떤 확실한 말씀도 가지고 있지 않소.”
더크 필립스는 “신약성서를 변호할 수 없어서 구약성서와 선지자들의 편지로 많은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에 여러 갈래의 분파가 나왔으며, 거짓된 예배가 세워졌다…. 그리스도 예수는 영이시며, 예전에 사라진 모든 형상의 진실이다.”라고 말했다. 더크는 진실한 해석자는 두 성서의 나뉨을 자각하는 해석학을 계발해야 하며, 두 성서 사이의 잠재적인 통일성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더크와 많은 아나뱁티스트 해석학자들에게, 이 잠재적인 통일성은 두 성서 모두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두 성서는 서로에게 동의하며, 연합한다. 두 성서는 구약의 끝이자 신약의 시작이신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 해석학이 강하게 두 성서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함에도, 이들의 강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두 성서의 중요한 통일성에 도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 초점은 두 성서 사이에서 인지되는 불연속성과 구분에 놓여 있었다. 
마펙이 이 주제에 관해 가장 급진적이었다. 그는 “반대편은 구약과 신약이 하나라고 주장한다”라고 비난했으며, 구약에서 나왔고, 그 문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개된 유아세례에 대해 거부했다. 마펙은 구약은 집의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신약이 그 집 자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집의 기반도 중요하지만, 기반과 집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더크 필립스와 함께 불연속성을 주장하고 있으나, 구약이 가진 기초로서의 중요성이 단절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러나 종말론에 관심이 있었던 후트, 호프만 그리고 다른 아나뱁티스트 해석학 지도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신경 쓰지 않고 종말론적이고 예언적인 본문을 선호하고 사용했다. 뮌스터파는 정도가 더 심했다. 신약을 표준으로 보는 관점에서 구약을 그들의 안내서로 보는 관점으로 바뀌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로트만은 구약이 권위가 있는 책이며 “신약은 그 구약에 기초한 진리를 포함한 책”이므로 관심을 많이 두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그룹인 안식교도들은 현대적 상황에서 구약의 법을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기본적인 해석 원리는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으므로 어떤 성서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교리와 교회생활에 대한 중요한 모든 점에서 두 성서는 일치하고, 아나뱁티스트들과는 달리 두 성서의 불연속을 보기보다는 두 성서의 가르침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데 집중했다. 
불연속성만으로 두 성서에 대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입장을 기술할 수는 없다. 그들은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를 가르쳤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구약을 거절하는 것도 아니며, 두 성서의 완전한 결별을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이 급진적으로 새로운 것이라 믿으며, 구약과의 연속성이 절대 파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약이 구약을 비난했다는 것도 아니고, 무가치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약은 신약 안에 포함되어야 하므로, 신약과 구별되어 별개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자들과 대조될 때 아나뱁티스트들은 최대한으로 열심히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성서를 다루는 법은 아나뱁티스트들과 종교개혁자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국가교회의 의식도 가톨릭 교회에 의해 변호되었듯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도 변호되었다. 신약을 근거로 정당성을 찾기 어려웠기에 구약의 할례가 가진 유사성에 의해 변호되었던 유아세례가 그런 의식 중 하나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구약의 의식을 교회에 적용하려는 정당성에 대해 저항했다. 그들은 할례는 유대인에게 적합하지만, 신약은 다른 의식신자들의 세례(침례)이 적합하다는 믿음 안에서 급진적인 새로운 질서를 소개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은 관념적이거나 개인적인 삶에나 적용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수도원의 질서와 같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시스템 속에는 수도사를 위한 자리가 없었고, 문자적으로만 이해된 신약 본문을 전 교회에 적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구약의 표준에 기초한 윤리를 계속하여 지지하였다.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은 이것을 신약의 새로움을 경시하는 것뿐 아니라, 신약을 구약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구약이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신약과 새언약의 관점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단 이것이 이루어지면 신약과의 조화 속에서 발견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유익한 것이 된다. 많은 토론 속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하려고 두 성서 사이를 쉽게 넘나드는 종교개혁자들의 시도를 아나뱁티스트들은 반대했다. 이것은 아나뱁티스트들의 눈에는 종잡을 수 없는 비합법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신약만이 윤리적 토론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힘차게 주장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두 성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아나뱁티스트들의 관점은 그들이 주장하는 말보다 좀 더 미묘하다. 리드만은 스태들러와 함께 주어진 본문이 그 자리에서 어떻게 법으로 혹은 은혜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의견에 동의했다. 은혜와 영적 중요성이 있는 말씀이 구약성서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광의의 의미로서 ‘새 언약’(신약)이라는 말을 썼다. 만약 율법적인 명령으로 잘못 해석이 된다면 신약 본문조차도 ‘옛 언약’구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리드만은 옛것과 새것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예수께 초점을 맞추었다. “예수에 의해 폐기되었고, 글과 문자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은 율법일 뿐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신약의 문자적 개념과 영적인 개념 사이의 관계를 밀접하게 연결지었다. 
스태들러와 리드만이 두 성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불연속성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새 언약의 개념을 넓은 의미로 사용했지만, 마펙은 두 성서, 구약과 신약의 확실한 개별성을 강화하고 설명하기 위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개념을 사용했다. 
뎅크와 스탤러의 주장은 이 두 가지 의견의 중간쯤 어딘가에 해당한다. 그들을 아나뱁티즘의 신령주의와 문자주의의 두 진영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종종 간주하지만, 그들은 두 성서의 연결을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용어를 사용했다. 뎅크의 진술을 보면 구약은 전적으로 신약에 포함된다고 제안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진실한 학생들이라면 그들이 비록 모세의 율법을 읽지는 않았을지라도, 전체 모세의 율법을 지킬 수 있다”라고 썼다. 그러나 소선지서의 일부를 독일어로 번역할 정도로 뎅크는 구약성서를 높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도 신약이 일차적 자료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모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차이를 확연히 구별했다.
우리는 아나뱁티스트들이 그들의 사고 속에서 두 언약의 관계를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두 성서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옛 언약과 구약의 전반적인 이해는 구약에서 나온 것은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 관계가 덜 명확하고, 두 성서 모두 본문의 영적 영향력에 따라 그 본문의 적용가능성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두 성서에 대한 아나뱁티스트적 관점의 기원
아나뱁티스트들은 두 성서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 신약의 본문들을 인용했다.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에게 결정적인 구절은 산상수훈으로 예수께서 반복적으로 구약을 인용하신 곳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다. 이 기초 위에 아나뱁티스트들은 구약은 예수의 가르침과 신약에 반드시 종속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아나뱁티스트 입장의 근거는 츠빙글리이다. 스위스 형제단은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들의 성서에 대한 견해를 그에게 빚지고 있다. 아나뱁티스트가 그에서 분리되기 전에 츠빙글리는 오로지 신약만을 설교했으며 결정적인 권위로서 신약의 주요성을 강조했다. 후에 있었던 토론에서 스위스 형제단은 그에게 이 강조점을 상기시켰다. 스위스 형제단의 도전적인 영향 아래서, 츠빙글리는 자신의 견해를 온건하게 바꾼 것으로 보이고, 신약이 명쾌한 안내를 주지 않는 부분에서 구약에서 찾을 수 있는 유사성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보 해석자들에게 해석을 제한시키던 그의 결심은 구약에 대한 리오리엔테이션재적응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의 초기입장은 자신의 급진적인 제자들에게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그 제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츠빙글리의 초기 강조점을 채택했고 그의 성서를 다루는 법이 일관성있는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츠빙글리의 영향력은 아나뱁티스트 관점에 대한 다른 설명을 이끌어냈다. 즉 그 설명들은 종교개혁자들과의 토론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어떻게 반대자들이 구약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아나뱁티스트들을 경악하게 했다. 우리는 벌써 종교개혁자들이 어떻게 아나뱁티스트들을 이단으로 결론지으려고 구약본문을 사용했는지 보았다. 이 경험은 아마 두 성서가 연속되지 않는다는 아나뱁티스트의 확신으로 그들을 이단으로 몰기에 더 확정적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의 독창성의 근거는 종교개혁자들이 가진 대안의 내용에 대한 철저한 불만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펙은 또한 두 성서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무서운 결론으로 이끄는 아주 슬픈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단지 뮌스터공동체의 잘못으로만 돌리지 않고, 농민의 반란과 더불어 전쟁 속에서의 죽은 츠빙글리 탓으로도 돌렸다. 그는 루터, 츠빙글리, 교황 그리고 거짓 아나뱁티스트들이 이런 면에서 다 비슷하다고 혹평했다. 
두 성서 사이의 불연속성에 대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주장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은 몇 가지 가능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들의 글들에서 나온 증거는 영향력 있는 다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아나뱁티스트의 주요한 관점인 그리스도 중심론이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표준을 위태롭게 하는 어떤 해석도 거절했다고 주장한다. 두 성서 사이의 확실한 구분은 종교개혁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해 타협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반영한다. 
아나뱁티스트 관점의 독특성
종교개혁자들과 아나뱁티스트들 모두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언적 권위가 있음을 믿었다. 둘 다 많은 구약적 의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인정했다. 많은 종교개혁자가 두 성서 사이의 불연속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루터의 글에서 어떤 문장은 아나뱁티스트가 쓴 것처럼 급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처럼 부처의 두 성서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점이 두 언약의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들과 달리, 그는 새 언약을 옛 언약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오실 예수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기에 잘 이해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두 성서 사이의 큰 불연속성을 가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칼뱅은 “끊임없이 아나뱁티스트에 저항하여 구약의 가치를 변호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아나뱁티스트들이 구약의 영적인 특징을 평가절하하고, 두 성서 사이의 불필요한 차별성을 만들어 내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뚜렷한 차이를 보는 데 실패함으로 신약성서의 가치를 평가절하할까 봐 근심했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는 두 성서를 구분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국가교회와 세속사회에서 행하는 관습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인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믿음, 유아세례, 전쟁참여, 그리고 구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그 밖의 문제에서 강제성을 정당화하는 시도를 거절했다. 윤리와 교회론에 대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좀 더 급진적인 접근은 그들로 하여금 구약성서를 달리 해석하게 하였다. 연속성이나 비연속성의 극단에 서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교개혁자와 아나뱁티스트들 사이의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는 그들의 윤리와 교회론에 대한 다른 결론 때문에 생긴 것이면서 다른 결론을 만들어 내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나뱁티스트와 구약
신약성서의 우선권과 두 성서 사이의 비연속성을 주장한 아나뱁티스트들은 상대적으로 구약성서에는 관심이 적었다. 구약성서에 상당한 관심을 둔 아나뱁티스트의 다른 그룹들에 의해 구약을 무시하는 주장이 비판받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들이 하나님 말씀의 일부를 거절하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스스로 변호했다. 비록 그들이 구약을 종교개혁자들이나 뮌스터그룹이 해석하는 방법과 다르게 다룰지라도, 구약성서를 다양한 방법에 의해 온전히 영감 받은 유용한 내용으로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가장 심하게 성서의 비연속성을 강조했던 마펙조차도 그의 입장이 성서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오류를 교정하는 수단이었다. 대부분 아나뱁티스트들은 구약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두 성서의 관계를 거절보다는 성취의 의미로 보았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여러 방법으로 구약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먼저, 그들은 구약이 신약의 내용과 일치된다고 생각될 때, 두 번째 권위의 자료로써 사용했다.  
두 번째, 아나뱁티스트들은 구약을 격려와 위로 및 영감을 위한 자료로서 그들의 경건 생활을 위해 사용했다.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들의 경건 생활에 대한 커다란 의무감 때문에 예언서나 시편을 율법서나 역사서보다 편애한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는, 종말론적인 아나뱁티스트들은 종말론적인 가르침과 사색을 위한 기초로서 광범위하게 구약의 부분들을 사용했다. 비록 이 그룹들조차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신약, 구약 사이를 구분할 필요를 강조했고, 종말론적이고 예언적인 본문에 대한 그들의 깊은 관심은 균형감을 제공했고, 두 성서의 다른 부분을 해석하기 위해 종말론적인 본문을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네 번째, 아나뱁티스트들은 오실 예수와 새 언약을 위한 중요한 준비로서 구약의 가치를 높였다. 구약은 신약시대를 예비하고 준비하는 특징과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고 존중되는 정도에서 교회에 유용한 것이다. 
다섯째, 아나뱁티스트들은 구약을 ‘그리스도의 완전성의 밖’에서 연속되는 권위를 가진 사회의 질서를 위한 안내자로서 간주했다. 새 언약 아래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신약은 탁월한 안내자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와 세상 사이의 이 분명한 차이를 구분 짓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구약의 원리와 기준을 교회에 적용하게 했고, 신약의 원리를 전체 사회에 적용하는 것을 비실제적이라고 주장하게 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약의 탁월함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아나뱁티스트들은 이것을 전 사회에 적용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끝으로 신약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확신할 정도로 구약을 기준으로 삼지 않은 아나뱁티스트들의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구약과 신약에 대한 그들의 접근방식의 현저한 차이는 구약의 문자적 의미에는 중요성을 별로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어떤 저자들은 구약을 문자대로 해석하려다 많은 실수와 혼란을 일으켰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문자적, 역사적 의미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피하고자 다양한 세대주의적 체계를 이용했다.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서로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용어와 개념을 표시하는 다양함으로 구약을 신약에 종속시키곤 했다. 
메노는 예표론과 알레고리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신약을 지지하는 구약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구약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는 합당하지 않고,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에게 합당한 가르침으로 인정하여 구약을 신약에 종속시켰다. 그래서 그는 더크의 방법이 위태롭게 만들었던 구약역사의 종교적 중요성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메노는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 사이의 유사한 특징을 판별하였다. 메노에게 있어 구약을 문자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불순종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반면 신약을 문자적으로 따르는 것은 순종이었다. 이와 같은 두 성서의 차별성에 기초에서, 메노는 구약에서 발견한 윤리적 기준을 구약에서는 사람보다는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시켰으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그것이 윤리의 규범으로 확실하게 변호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약의 내용을 알레고리화하지 않고 두 성서 안에서 문자적 영적 사이의 관계를 분별하면서 구약에 영적인 뜻을 부여했다. 구약에서 문자적인 내용은 신약이 말하는 영적인 실제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신약은 실제이며, 본질이며, 성취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구약은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문자적 의미는 적용이 어려워 영적인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펙이 구약을 보는 관점은 루터가 본 관점보다 더 적극적이다. 루터는 구약을 율법으로 보게 함으로써 이신칭의의 확신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필사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만, 마펙은 구약을 ‘첫 번째 은혜’로 봄으로써 좀 더 긍정적인 개념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루터는 구약을 적용될 만한 윤리의 기준으로 생각했으나, 마펙은 구약을 그리스도인 이전 시대의 것으로 강등시킨 것이 다소 역설적이기도 하다. 더크와 메노와 함께, 마펙의 관심은 구약을 신약과 별개로 이해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피하지 않으면서 구약을 안전하게 이용하는 적절한 틀을 찾는 데 있었다. 
이런 모든 접근법과 직유법의 두 가지 목적은 구약이 실제이나 제한적인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단언하는 것이다. 구약은 영감으로 쓰인 성서이나, 신약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상징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의미들은 그것이 가리키는 신약의 실제와 비교되면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구약의 상징들을 얕잡아 보아서도 안 되고, 산만하게 활용 되도록 허락되어서도 안 된다. 만약 두 성서가 본질적 차이로 말미암아 두 권의 책으로 분리된 비연속성의 요소를 자세히 관찰한다면 두 성서 사이의 연속성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비판과 평가
두 성서 사이의 비연속성에 대한 아나뱁티스트들의 강조는 때때로 비판되듯이, 구약을 비하하는 불균형적인 접근인가? 그들은 예수와 사도들이 자유롭게 사용하던 틀인 신약을 읽기 위한 필요한 틀로서 구약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구약이 초대교회의 성서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고 평가된다. 
마르시온적인 경향을 보이는 마펙의 해석학을 비난하는 것은 근거가 있을 것이다. 마펙은 분명히 두 성서의 차이점을 과도하게 강조했다는 잘못이 있다. 구약의 충분히 계시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두 성서 모두 연결된 공통된 특징을 주목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난을 조금 완화할 수 있는 요소를 그의 변호에서 볼 수 있다. 루터 또한 비슷한 경향 때문에 비난받을 수 있었다. 마펙은 그의 접근을 연속성과 비연속성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교정수단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그의 좀 더 적극적인 평가를 보면, 마펙은 구약을 사용하는 면에서 마르시온과 의견을 달리한다. 그의 관심은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나뱁티스트의 접근법을 평가하는 다른 방법은 그것을 종교개혁자들의 접근법과 대조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두 접근법보다 더 좋은 제3의 대안이 존재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종교개혁자나 아나뱁티스트들이나 구약성서를 적절하게 다루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루터의 척도인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은 좋게 들리지만 아주 많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남긴다. 또 성서의 연속성과 구약성서를 다루는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은 교회와 사회를 구별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타협하게 되었고,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을 배제하듯이 보이는 구약 중심의 많은 의식을 따르려는 경향과도 타협하게 된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러한 견해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교회 안에서 권위의 근원인 구약을 버리는 쪽으로 잘못을 저질렀다. 
그들의 확신을 변호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하여 그들의 구성원들에게 일관된 성서에 대한 접근법을 제공해 주기 위한 전략으로서, 아나뱁티스트들의 입장은 성공적이었다. 구약을 다루는 아나뱁티스트의 방법을 수용하는 것이 구약을 사용하는 종교개혁자들의 방법을 수용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나뱁티스트 입장을 비판 없이 변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두 성서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아나뱁티스트의 확신에 더 안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방법을 찾아내는 일을 금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알빈 비체이(Alvin Beachey)는 더크 필립스의 입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역사적 상황을 인정할 때, 더크의 해석학적 방법은 효과적인 저항이었다. 이 방법을 떠오를 수밖에 없게 한 역사적인 상황이 없었다면 그의 방법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아나뱁티스트의 입장을 ‘효과적인 저항’이라고 보는 것은 아마 최선의 평가일 것이다. 이 저항은 그들의 확신에 많은 열매를 맺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념이 오늘날 별로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는 반면, 두 성서 사이의 비연속성을 변호하는 아나뱁티스트들의 확신은 널리 수용되고 있다.
우리는 당연히 아나뱁티스트의 방법론에 대해 불만족을 표현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중심성과 신약의 급진성을 왜곡하는 방법에 대해 도전했다는 측면에서 그들의 유산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현대 해석학자들의 임무는 교회론과 윤리에 대한 중요한 아나뱁티스트의 관점으로 믿음의 책, 구약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며, 구약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일이며, 아나뱁티스트들이 애썼으나 실패한 두 성서 사이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정리하며:아나뱁티스트를 위한 증언
1. 종종 어떤 일이 생기면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답은 예수에게만 있다거나 오직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교회사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이 고백한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유일한 중심이라고 고백하고 그 길을 걸었던 것과 같은 삶의 증언이 있는 곳이얼마나 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수년전부터 여러 교리를 다룬 책들이 유행인데, 이들 대부분은 서신서를 복음서 위에 둔 관점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예수를 따르는 교회가 아니라 바울의 교리를 받잡는 교회가 되었고 강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따르지 못할 가르침이라면 그것은 종이호랑이이며 박제로 걸어둘 것이라면 거기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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