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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나뱁티스트 전통에서의 성서해석 
2. 스스로 해석하는 성서 
3. 그리스도 중심론과 두 개의 언약 
4.성령과 말씀
5. 공동의 성서해석과  순종의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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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뱁티스트 해석학에서 중요한 구성요소는 성서가 스스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다. 

간단, 명료, 그리고 분명함

스위스 형제단의 콘라드 그레벨은 성 갈렌의 종교개혁자 발라디안에게 글을 쓰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기교가 아닌, 은혜로 단순하게 믿는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동료, 펠릭스 만쯔는 자신의 순교 직전에 “만약 오직 말씀만으로 자유롭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면 아무도 그 사실에 저항할 수 없음을 나는 안다”라고 짧은 글을 남겼다.  유아세례에 대해서도 성서의 어떤 부분도 유아세례를 지지하지 않으며 성서만이 유일한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슐라이트하임 고백에서도 문자 그대로의 성서를 가르치는 것을 강조했다. 맹세에 대한 토론을 보면,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의 가르침인 맹세하지 말라는 명령을 자명한 것으로 인용하였다. “그리스도는 단순하게 ‘예’이며 ‘아니요’이시다. 그를 좇는 모든 사람은 그의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나님의 단순한 명령’을 믿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추방당하였다. 
가장 해박한 신학적 훈련을 한 스위스 지도자, 발타자르 후브마이어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순종하기에 용이하도록 직접적이다는 자신의 확신을 가지고 성서의 개인 해석의 권리를 강하게 확신했다. 그는 “너의 양심으로 판단하라. 말씀이 스스로 중재자로, 판단자로 있을 수 있도록 하라. 그러면 너희가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의 책 『신자의 기독교적 세례(On the Christian Baptism of Believers)』에 썼다. 학자나 목사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 없이 평신도가 성서를 해석하면 길을 잃기 쉽다고 가르친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후브마이어는 성서 이외의 권위와 의견을 첨가하면 사람들을 더 헷갈리게 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명확하고, 투명하고, 순전하고, 이해하기 쉽고, 단순한 것”이었다. 
필그림 마펙은 독일교회에서 이런 성서이해 접근법을 지지하고 옹호했다. 그의 설교에서 세례에 대해 “여러분이 성서의 간단한 본문을 취해서 읽는다면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미묘하고 복잡한 사색은 뒤로하십시오. 그리하면 많은 의문이 곧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그들의 이성만을 이용했으며, 간단하고 분명한 성서 본문의 설명을 간과했으며, 성서를 그들의 이해에 끼어 맞추려고 했고, 그 의미 자체에는 덜 집중했기에 단순한 사람들이 성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훨씬 헷갈리고, 혼동되게 만들어 놓았다”고 결론 지었다. 
다른 아나뱁티스트지도자들처럼, 마펙은 성서를 해석하기 위해 해석학적인 틀을 올려놓아 기존의 신학적 입장과 맞추려고 하는 인간적인 노력에 대해 저항했다. 그는 개인의 성서해석 권리를 옹호했고, 성서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가르쳤다. 후브마이어처럼 그는 지도자들에게 해석을 위한 지침보다 성서본문 자체에 집중하라고 충고하였다. 이는 잘못된 해석은 성서본문에 의지하지 않을 때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다.
멜키오르 호프만은 그의 책 『하나님의 규례(The Ordinance of God)』에 모든 믿는 신자들은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그의 관점을 피력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이 신부를 솔직하고 쉬운 말로 대하는 것처럼 그의 백성을 대하여 오셨다…. 그래서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충고한다. 감당하기 너무나 어려운 현학적 논쟁에 자신을 내어주지 말고, 오직 단순성 속에 계신 하나님의 직설적인 말씀에 자기 자신을 붙잡아 매라고…. ”
메노 사이먼스는 이렇게 성서의 명료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형제들이여, 무엇보다 나는 사람의 교리와 영악한 이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 문제에 관해, 성서를 왜곡하는 것과 많은 주해와 많은 상상을 용납할 수 없으며, 성서는 단순하다는 것을 단지 믿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기 원합니다.” 또한 아나뱁티스트들을 법정에서 회유하는 일에 대해서 “행정관들이 정의가 자신들의 편이라면 맹세를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이 맹세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을 주님의 간단한 말씀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이 법정에서 남긴 증언들은 신자들에게 성서를 읽을 권리를 준 지도자들에 대한 태도와 더불어 날카로운 질문과 혹독한 압력 앞에서도 엄청난 신앙과 자신감을 드러낸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성서의 명백한 의미에 대해 그리고 개인적 해석의 권리에 대해 말로만 외칠 뿐이며, 실제에서는 이 원칙에 대해 너무 많은 조건을 갖다 붙이면서, 모든 권한을 개인들에게서 거의 박탈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성서의 단순성과 명확성, 평이함에 대한 그들의 계속된 강조는 종교개혁자들의 어정쩡한 태도에 도전하며, 더 급진적인 접근을 하도록 설득했다. 특별히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이성에 의존하는 것과 성서의 해석을 목사들과 성서학자들에게 국한하는 태도를 조금씩 확대 적용한 것과 그들이 교리적이고 전통적인 해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과 성서를 명확히 설명하기보다는 대충 얼버무리는 성서 외적인 자료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들은 성서를 이해하는 보조자료로서 이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했듯이 인간의 이성과 교육, 원어에 대한 지식과 철학이 성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거나, 더 효과적이라는 데에는 깊이 확신하지 않았다. 그들의 염려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만약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레벨의 교육과 이성적 능력이 필요하다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은 가톨릭교 밑에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 그들은 아직도 성서가 의미하는 바를 말해주기 위해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성을 의존함으로 인해 본문 자체를 설명하기보다는 그 말씀 위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을 덧붙이는 경향이 농후해지는 현상이었다.
존 하워드 요더는 아나뱁티스트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공교육과 현학적 티가 나는 것을 분별하였다. 성서의 더 큰 의미를 놓치는 수단으로서 그러한 학문은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쓸모없는 것들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그들이 상식을 무시했다는 말이 아니다. 대신 그들은 이성과 학식은 도구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특별히, 메노는 어떻게 지식과 이성이 사용되고 있는가에 대해 많은 염려를 표현했다. 그는 “오, 하나님, 이 세상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 높은 학식을 갖춘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최소화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자신들의 바보 같은 이성과 지혜를 사악하게 충동질시키고 있습니다”라고 언급“자신들의 날카로움과 명철한 철학으로 높은 명성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를 현혹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단순한 가르침을 왜곡할 때마다 우리는 사람과 거짓의 교리라는 관점을 가지고 그들의 가르침을 재고해야만 한다”고 언급했다.
더크 필립스는 이성이 성서해석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드러내는데 사용될 뿐인 것을 지적했다. 특히 여러번 유아세례에 대해서 “그들이 눈먼 이성을 따랐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 모든 잘못된 결론들이 나왔다”고 결론 지었다. 또한 “세상에서 높이 추앙받는 사람들, 자기들이 더 잘난 학교들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자신들만 선생이며 성서를 통달한 대가들이라고 생각하고, 왜곡된 서기관들보다도 더 복음과 기독교와 참 신학과 성서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난했다. 속담에 의하면,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더 많이 빗나간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 혼자서 성서의 교사와 마스터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기본학교의 초급 독본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 가 본 적이 없으며, 그들은 진실한 교사이신 성령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들에 의하면 유일한 합법적인 이성은 학문적인 기술보다는 상식에 다소 가까운 것이다.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들은 성서에 접근할 때, 감정적이거나, 신비적이거나, 신령한 접근법을 하지 않았고 단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성서를 해석할 능력이 없다고 믿는 종교개혁자들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학문과 고등 교육의 영향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신뢰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학문적인 훈련의 균형이 성서를 명확하게 보게 하기보다는 관점을 흐리게 하며, 유익보다는 해로운 점이 더 많다고 느꼈다. 우리는 성서의 적합성과 성령이 인도하는 합리적인 보통사람들이 성서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아나뱁티스트들의 기본적인 확신 속에서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들이 제공하는 해석학적 기준을 이해해야만 한다. 

교리와 전통의 영향력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오직 성서’라는 말의 의미는 성서가 모든 다른 권위에 도전하는 데 자유로워야만 하지만, 성서자체는 확고하게 세워지고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의 눈에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성서는 전통적인 견해를 도전하도록 허락되어 있지 않았으며 몇몇 중요한 분야와 관련된 교리만 수용될 뿐이라고 느꼈다. 예정론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강조는 답답한 성서공부처럼 보였고, 아나뱁티스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신선하고 개방된 열린 생각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한스 쉴라퍼는 “교황이나 교회 신부나, 의회가 뭔가 다른 것을 명령하고 결정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교회 신부나, 의회를 의존하기보다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 안에서 세워진다는 것이 더 확실하고 진실한 기초이다. 마지막 날에 교황이나 신부나, 의회가 아니라 그리스도가께서 심판대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얼마나 오래된 전통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더 오래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히 계실 분이시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스 킨트는 그의 심문관이 교부 자료에 의존하는 모습에 대해 비난하며 도전했다. “어거스틴에 대해 말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나는 그를 모르오. 나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해 주었으며, 높은 하늘에서 우리 구주가 가지고 오신 말씀의 교리, 그리고 그의 하늘 아버지의 입에서부터 나온 교리, 그리고 보배로운 피로 인친 교리 외에는 어떤 교리도 알지 못하오. 이것 때문에 내가 차라리 불로 들어가길 원하는 것이요. 그러나 어거스틴, 그레고리 암브로스 이런 사람을 나는 모르오.”
메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토마스 아퀴나스, 스코투스, 보나벤투라, 오캄 같은 학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지 않은 모든 가르침은 땅으로 추락한다고 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누가 어떤 주장을 했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주장이 성서와 일치하는가에 관심을 뒀다.
한 심문관은 1559년에 아나뱁티스트 여인, 클래스켄에게 이런 질문으로 꾸짖었다: “너는 1,500여 년 전의 거룩한 신부들보다 더욱더 많이 알고 있느냐? 너는 네가 단순하고 무식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녀의 대답은 학문이나, 지식이나, 신학적 평판이 정확한 해석학의 열쇠가 아니라는 전형적인 아나뱁티스트적인 확신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나는 비록 단순 무식한 사람이지만, 주님을 아는 지식만큼은 단순무식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는 자들에게는 이런 것을 감추시고,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 그것을 드러내신 것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버지께 감사한 것을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네덜란드 아나뱁티스트들은 메노와 더크는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행함을 기준이라고 받아들일 때, 루터나 칼뱅보다 더 급진적인 교회로의 회복의 원리를 제안했다…. 메노나이트들은 모든 후대의 교리와 교회 신부들의 가르침을 인간적인 견해라고 간주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아퀴나스나 다른 학자들과 달리 신학과 성서적 해설을 결합시키는 어거스틴의 방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성서는 어떤 기초적인 교리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나뱁티스트들은 2가지 이유 때문에 그것을 거절했다. 성서보다 우위에 있는 교리적 기초를 만드는 것이고 그 때문에 성서의 위상은 격하되며, 그것은 성서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익숙한 예가 루터의 야고보서에 대한 혐오증이다. 그는 야고보서에서는 이신칭의에 대한 주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성서를 무시했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오직 성서’는 교리의 관점에서 성서를 이해하는 대신, 성서가 교리적 헌신을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가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의 교리의 부재이다. 그들은 제자도를 다루는 실제적인 이슈들을 몇 가지의 신앙고백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권위적인 교리적 주장은 아니었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그들 개혁의 초기에는 성서적인 가르침에 바탕을 둔 원리와 실천에 집중하였으나 후에는 그들이 힘들게 깨달은 것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음을 보고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아나뱁티스트의 회의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성서의 명료성에 대한 아나뱁티스트들의 강조는 성서가 많은 부분에서 모호하다고 간주하는 종교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는 대조적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성서의 모호성은 성서의 도전을 피하기 위한 또 다른 장치로 이용된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는 믿음에 대한 교리적 내용에는 명확하지만, 교회론이나 윤리를 다루는 데는 그렇게 단호하지 않다고 말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오직 성서’라는 말에 일치되지 않는 이런 구분에 대해 거절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서’의 원리에 충실해지려 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그 원리를 전적으로 이행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확신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의 해석학적 접근은 그들의 토대에서 신학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무너뜨리는 도전을 추구함에 따라 다소 인습 타파적인 것이 되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해석에서 교육과 이성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시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반지성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성서에 대한 신실한 순종 위에 오히려 자신들의 관심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주장이 정당하든 아니든 간에 그들의 상황 속에서 다루어진 비판이라는 점에서 고려돼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주장은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존재감 있는 진실한 도전이었다. 가끔 세련되지 못한 언어표현에도 불구하고, 아나뱁티스트들의 주장은 광신자들의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반대자들이 포기를 강요할수록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들의 접근법이 지시하는 바대로 살아냈다. 

신학적, 사회적 그리고 실제적인 요소들

첫째, 아나뱁티스트적 접근법은 특징적이며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개혁자들이 품었던 생각의 적용이 아니라, 루터나 츠빙글리보다 더 급진적 개혁가인, 칼슈타트 와 뮌쩌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장점과 더불어서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아나뱁티스트적 접근은 널리 퍼져 있는 해석학적 가정 및 전제에 대해 도전했고 일치되지 않는 영역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두 번째, 이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형성되는 시기 동안 아나뱁티스트적 접근은 실제로 수천 명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자유롭게 했다. 약점이나 불균형 또는 무정부상태의 끊임없는 위험이 있었지만, 종교개혁이 약속은 했으나 성취하지 못한 것을 아나뱁티스트는 평신도와 여성들을 참여케 함으로 가능케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는 확신 때문에 순교의 상황에서도 교회와 국가를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찾았다.” 말씀의 내용만이 그들을 들뜨게 한 것은 아니었다. 새롭고 자유로운 해석학이 보통신자들도 말씀을 공부하고 반응할 수 있도록 지위를 부여해 준 것이었다. 
셋째로, 아나뱁티스트적 성서접근 자체는 적절한 것은 아니다. 특별히 학문을 얕보는 태도와 성서 안에 있는 어려움을 인식하는 데 실패한 것은 평신도의 참여가 정확하고 믿을 만한 성서해석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할 뻔했다는 것이다. 많은 성서 독자가 성서의 단순함에 대해 전제하는 것이 원래 저자들이 경험했었던 다른 역사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의도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런 부족한 점을 인식함으로 학자들의 공헌을 환영했고, 다른 해석학적 원리 또한 적절한 해석을 확실하게 하려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어떤 사람들은 이 주제에 대해 개혁자들과 비슷한 접근을 수용했으며 기초가 되는 사랑의 원리를 대신하는 내용을 성서에서 떼어오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다. “성서를 존중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무식한 성서필사본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해 온 것처럼, 성서를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를 조심해야 한다.”라고 한스 뎅크가 말하였다. 그는 책을 쓸 때, 비록 문자적 해석에 대한 경고 뒤에도 몇 줄은 문자 자체의 중요성을 강하게 강조하기도 했지만, 성서의 문자적 해석보다는 사랑의 원리에 의해 인도되는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그에게 있었다. 필그림 마펙의 글에서 보면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아마 중재하는 역할의 위치를 맡은 듯하다. 마펙은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율법주의이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성서의 가르침을 버리는 위험에 빠진 신령주의적 접근에 대하여 나누어진 경향을 거부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가 성서의 해석자’라는 원리에 대한 헌신은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밀도 있게 다시 점검하여 달라고 요구한다. 만약 어떤 아나뱁티스트가 성서의 문맥과 전체 성서의 일반적인 흐름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적어도 이런 도전은 개혁가들이 그들의 체계와 성향에 잘 맞지 않는 세세한 내용에 주의를 집중하지 못한 점을 점검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아나뱁티스트에 반대하던 비판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명확성, 즉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다는 이해에 대한 그들의 헌신은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며, 평범한 그리스도인도 성서를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은 매력적이고 도전이 되는 유산을 남겼다. 

(정리후기: 성서의 내용을 성서가 풀어주고 있다는 생각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그 은총이 넉넉하게 임한다고 믿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런 고백과 성서에 대한 절대적 의지는 성서의 권위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최고의 반응일 것이다. 온갖 학자들이 유추하고 설명하는 이야기들을 성서 위에 얹어 놓고 그 아래에 있는 스스로 해석하는 말씀의 능력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학자들의 연구와 통찰이 가져다 주는 유익을 인정했지만, 분명하게 그 역할을 그었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21세기의 신자들이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성구의 나열이나 신학적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성구 등은 말(Word) 즉 하나님의 계시가 부차적인 장식물로 치부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한편으로 지나치게 개인적인 성서에 대한 믿음이 가져올 수 있는 성서해석의 전통은 그보다 절대 소홀히 다루지 않은 교회가 같이 읽고 같이 듣는 성서 해석의 전통에서 많은 부분 보완된다. 스스로 성서를 대하되 더 많은 신앙의 공동체 멤버들이 해석한 것에도 귀를 기울이면 그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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