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최봉기 목사의 추천글

by 배용하 posted Oct 30, 201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여기 한국 교회가 따를만한 모범이 있다”

최 봉 기 ---- 전 침례신학대학교 교수 / 전 미 버지니아 평화교회 담임목사

한국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목소리들이 고조되고 있다. 이구동성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변화의 방향과 내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선교 신학자 한 분은 변화의 요구 상황을 다루는 개념 선택에서 개혁이냐 대안이냐를 놓고 고심한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개혁은 이미 개신교의 역사적 출발점이었던 만큼 다시 그 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부담스럽단다. 또한,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개혁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해서도 다시금 자신이 없다고도 했다.그렇다면, 대안이어야 할 텐데 문제는 용어가 적합하더라도 역사적으로 검증된 모범 즉 실재하는 본보기가 없으면 신뢰도 설득력도 없어서 무의미하다는 의견을 같이 나누었다. 나는 그때 얼른 아나뱁티스트를 떠올렸다.

내가 아나뱁티스트를 체험한 지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간다. 미국에서 윤리학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을 때에 지도교수가 평화에 대해 공부하려거든 그들을 찾아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맛을 보아야 할 것이라고 추천했다. 그때 나는 인근에 있는 메노나이트 교회를 찾아가 아나뱁티스트들과 함께 신앙과 삶을 나누었으며 그 뒤에도 독일 스위스 등 그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연구를 쉬지 않았고 교수 안식년을 맞이해서는 미국 동부에 있는 이스턴 메노나이트 신학대학원에서 일 년 동안 상주하며 대화와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미국으로 이주해 온 지금 나는 침례교목사인 동시에 메노나이트 대학교에서 평화에 관한 학문을 공부하고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안수를 받은 사역자가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당시 미흡했던 종교개혁의 대안으로 출발했던 지난 500여 년 동안의 아나뱁티스트들의 발자취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또한, 그토록 참혹했던 박해의 과정에서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다져져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현대에 이르렀고 그들이 지키고 살아온 평화교회 전통의 영향력과 동시에 고민이 무엇인지를 단순한 외부자의 관찰이나 학습이 아니라 내부자가 되어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처럼 역사적으로 검증된 아나뱁티스트의 실천적 신앙 내용이야말로 현재 우리 한국 교회가 직면한 변화의 요청에 부응할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으로 보았던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개혁 당시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성서의 사람들이요 선교의 사람들, 성서를 직접 해석하고 실천한 사람들, 그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일의 중심에 두고 그분의 말씀을 즉각적으로 따름으로 급진적인 제자도를 실천한 사람들, 산상수훈을 있는 그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했든 사람들, 형제애와 상호부조를 통하여 나눔의 공동체를 구현한 사람들, 그래서 평화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비폭력적이고 무저항을 실천한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통하여 이 시대의 순교자, 곧 백색 순교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한국교회가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한다면, 오랜 세월동안 역사적으로 검증되었으며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적합한 모범으로 아나뱁티스트를 제시하는 데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스튜어트 머레이는 이 책을 통하여 그 아나뱁티스트를 순진하게 해부하였다. 이 책의 원 제목이‘The naked Anabaptist’인 것은 그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아나뱁티스트에 대해 말하면서 무엇을 감추거나 에둘러대지 않았다. 또한, 크게 자랑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없이 그냥 발가벗는 심정으로 정직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아마도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후터라이트, 아미시, 혹은 메노나이트 그 어느 곳 소속도 아니며 앞으로도 소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는 그냥 실천이 동반된 신앙의 풍요한 전통을 소유하고 500여 년을 지나면서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역사적 평화교회라 불리는 아나뱁티스트인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적으로 아나뱁티스트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그들의 정체성을 알고 그 기나긴 여정 속에 자신을 합류시키고자 했다. 그는 이렇게 아나뱁티스트를 깊이 알았기에 동시에 그들의 단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저자는 아나뱁티스트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면서 이제 더는 이들을 과거의 어두운 그늘 속에 묻혀 있거나 혹은 주류로부터 분리되어 이탈했거나 아니면 여전히 의심쩍게 홀대받는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아나뱁티스트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면서도 지금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하나의 이머징e-merging 교회라고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아나뱁티스트와 대조되는 기독교를 크리스텐둠Christendom으로 부각시켰다. 물론 이것은 그만의 독특한 개념이 아니다. 크리스텐둠이란 기독교를 국교화한 콘스탄틴 황제 이후 가톨릭, 그리고 가톨릭에서부터 개혁을 시도했던 루터, 칼빈, 쯔빙글리, 영국 국교회 등 미흡한 개혁을 그대로 정당화시키면서 교회의 영역을 제국주의적으로 확장하고 또한 같은 방식으로 유지하는 개신교 등 기독교의 부정적인 일반 현상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에 대해서 여전히 개혁의 대상이라든지 대안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이유는 바로 과거나 지금이나 최소한의 형식적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면서 기독교의 기득권을 누리고 유지 시키려는 타락상 때문이다.

머레이는 아나뱁티스트의 장점에 대해서 너스레를 떨고 약점을 에둘러 대는 비겁한 저자가 아니었다. 그는 아나뱁티스트의 단점과 그 한계를 알고 있으며 그것들을 감추기보다는 들어 내놓고 솔직하고 거리낌 없는 대화를 원한다. 그는 아나뱁티스트의 너무 실천적 행동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적 성향을 지적한다. 예수 중심에 둠으로 신약을 강조하다 보니 구약을 홀대한다는 비판을 받는 등 그들의 선택적 성향을 지적한다. 매우 역설적으로 보이나 그들의 예외적인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의 극단적 성향을 지적하기도 한다. 성경해석의 다양성과 파문의 실천으로 말미암은 분열과 분파, 분리주의적 성향도 지적한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침묵과 은둔적 성향도 지적한다. 그리고 모든 운동이 다 그러하듯 적당한 시기에 제도화되는 순응과 타성적 성향도 지적한다. 아마도 이러한 예리하고 날카로운 지적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돋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이런 지적사항을 이 책에서 보지 못했다면 독자들에게 추천하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든 진실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며, 종교, 정치, 경제, 사회든 이제 우리는 모두 면에서 진실에 합류할 때가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점의 벽을 넘은 다음에도 저자는 여전히 아나뱁티스트를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내가 이 책을 여러분 모두에게 추천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어느 무엇 혹은 누구의 장점에 대해서 무심코 장단을 치며 따르거나 있을법한 흠에 대하여서 흉만 보고 배척하는 삶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이 시대의 질병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개독교”“도가니”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는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우려하고 있다. 대안을 찾고 있으나 따를만한 모범을 발견하지 못해서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이 땅의 목회자, 신학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가 한번 읽어보았으면 한다. 이는 모두를 아나뱁티스트로 초청하는 것이 아니다. 아나뱁티스트는 지나간 역사 속에서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각자가 있는 곳에서 그들과 더불어 우리의 중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바라보고 믿고 따르자는 것뿐 이다.

이 책을 번역한 강현아님은 과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들을 내려놓고 메노나이트 신학교에 들어가 그들의 신학과 신앙을 함께 나누었기에 이 책의 번역자로 적합하다고 본다. 이 책을 출판한 대장간은 지금까지도 그러했거니와 앞으로도 이 땅의 기독교 신앙이 바르게 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어려운 형편에서도 굽히지 않기에 더욱 신뢰가 가고 기대가 된다. 좋은 책이란 아마도 그렇게 해서 나오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