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잣틀러Michael Sattler

by 배용하 posted Mar 0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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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0~1527
마이클 잣틀러는 아주 찬 수도원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에 집중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고, 갑자기 한 무리의 농부들과 마을 사람들이 수사들이 기도하는 수도원 예배실로 들이닥쳤습니다.
“우리가 수도원을 정복했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가 들어지기 전까지 여기를 떠나지 않겠다.”며 농부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1525년, 독일의 프라이브르그 (Freiburg)라는 작은 도시 근교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마이클 잣틀러는 도시의 수많은 사람이 교회 리더들에 대해 불평이 가득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화가 많이 나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마이클은 왜 그런지 그 이유가 알고 싶어졌습니다.
예배실 안에 있던 다른 수사들이 불편한 채로 뭔가를 기다리는 동안, 마이클은 농부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수도원을 공격한 것은 교회에 속한 그 어떤 사람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이클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는 그들의 불평에 대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우리에게 설교할 사람을 직접 임명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며 그들 중 한 명의 리더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참된 복음을 듣기 원합니다.” 하며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내는 교회 세금이 한 푼도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사용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무척 화가 나 있었습니다. 농부들은 교회에 보여줄 그들의 불평과 요구 사항을 12개의 항목으로 써 내려갔습니다.
마이클은 “참된 복음”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염려해 왔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며,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 농부들과의 만남이 있고 나서, 마이클은 자신이 수사로서는 더는 예수님을 따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떠나, 베긴회 (Beguine)의 수녀로 있던 마가레타 (Margaretha)와 결혼하고 나서, 스위스로 향했습니다.
스위스에서, 마이클과 마가레타는 아나뱁티스트라 불리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아나뱁티스트들은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폭력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아세례가 아니라, 성인세례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듯이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곧 마이클은 조지 블라우락 (George Blaurock)과 콘라드 그레벨 (Conrad Grebel), 그리고 펠릭스 만쯔(Felix Manz)와 더불어 일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이 믿는 참 복음을 설교하며 새로운 아나뱁티스트 교회에 속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1525년 3월 16일, 마이클은 열여덟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8일간, 쉴 새 없이 많은 질문을 줬습니다. 결국, 9일째, 그들은 석방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다시는 세례를 베풀지 말 것이며, 스위스를 떠나라는 명령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마가레타는 마이클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뻤습니다. 위험에도, 마이클과 다른 사람들은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했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이클은 아나뱁티스트들의 공동체와 교회에 격려의 편지를 써 보냈고, 이들이 부를 찬송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다시 체포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청회가 열렸고 아나뱁티스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변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판사들은 아나뱁티스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정부와 교회를 반대하는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부의 권위를 불신하게 하게 할 것이라며 정죄하였습니다.
만쯔, 그레벨, 그리고 블라우락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교도소에 투옥되었고 마이클은 취리히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1526년 2월, 마이클과 마가레타는 조금 더 안전한 도시인 스트라스부르그 (Strasbourg)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들은 독일 남쪽지역에 교회들을 세우려고 떠나기까지 1년이 조금 못된 기간에 거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 아나뱁티스트들은 정부 관료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잡혀가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마이클은 자신의 재침례 신앙을 보다 분명하게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다양한 여러 그룹을 신앙고백을 통해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다른 아나뱁티스트 리더들도 문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였고, 이에 1527년 2월에 슐라이타임 (Schleitheim)이란 마을에 모여, 마이클이 초안을 잡은 일곱 가지 조항의 신앙 고백을 검토하였습니다. 당시 리더들이 동의하여 만든 신앙에 대한 조항들은 훗날 슐라이타임 신앙고백 (Schleitheim Confession)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아나뱁티스트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슐라이타임 동의를 이루어낸 마이클의 만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와 마가레타가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이클의 재판은 사흘 동안 지속하였습니다. 제3일에 그는 고문에 처해 지고, 결국 화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고문을 당하는 동안, 마이클은 자신을 고문하는 고문관들을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그가 화형을 당하는 순간, 불에 가까이 내려지는 순간까지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기도와 찬송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이 죽은 지 이틀 뒤에, 마가레타도 근처의 네카 강 (Necker River)에 수장되었습니다.
비록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이 사형을 당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살아서 빠르게 번져나갔습니다.

-"용기있는 믿음의 사람들"(대장간 201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