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KAF 모임에서 나눈 글

by 신광은 posted Jul 16, 201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아나뱁티스트 신앙에게 주어진 기회


  by Caleb


저는 한국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입니다. 저는 최근에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배워서가 아니라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또한 신학을 연구하는 중에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전통이 신약교회의 전통과 가장 가까우며, 그리스도의 뜻에 가장 가까운 교회의 전통이라는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생적 아나뱁티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아마도 세계 도처에는 저와 같은 자생적 아나뱁티스트들이 많을 줄로 믿습니다. 제가 보기에 21세기 초, 오늘날 아나뱁티스트 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놀랍고 커다란 기회를 받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몇 가지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1. 국가교회의 해체


스탠리 하워와스는 그의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에서 1963년 어느 주일날을 후기 기독교 사회로 진입한 때라고 규정했습니다. 후기 기독교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후기 기독교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국가와 교회와의 완전한 단절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국가의 제도적, 정치적 권력과 완전하게 분리된 것은 지난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후 처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자그마치 1700년 만에 최초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와 교회의 완전한 분리는 지난 1700년 동안 교회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겪게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유아 세례의 타당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 교회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 더 이상 국가의 강제력을 활용할 수 없게 된 점,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질 만한 어떠한 특권이나 이점을 찾을 수 없다는 점 등이 그 예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 다원주의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요청으로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인된 니케아 신조는 단숨에 기독교를 유일종교로, 그리고 기독교 진리를 유일진리로 통일시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그 종교(the Religion)가 아니며 기독교 진리도 더 이상 그 진리(the Truth)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많은 종교 중 하나(a religion)며, 기독교 진리 역시 여러 진리들 중 하나(a truth)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일찍이 서구 기독교가 겪어 본 적이 없는 대단히 새롭고 낯선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 휩쓸고 있는 21세기 초두에 교회는 이 새로운 현상에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현대 교회의 신앙의 위기, 전도와 선교의 위기 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현상은 아나뱁티스트에게는 커다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나뱁티스트는 처음부터 신앙의 자유를 강조해 왔기 때문입니다. 초대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나뱁티스트들도 자신들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가장 가까이 일치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유일한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증언할 때 어떠한 강제력이나 물리력을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복음 자체의 권위 이외의 다른 외적 권위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복음을 설득하고 권면하기를 힘썼으며, 인내로써 증언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증언한 복음을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복음의 타당성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한 이유는 참된 신앙이란 오직 복음을 듣는 자의 자유로운 결단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상대방의 생각과 사상,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는 공손한 태도이며, 성령께서 일하시기를 기다리는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나뱁티스트는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을 다원적 상황 가운데 위치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원주의적인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여전히 기독교 신앙이 가능하며, 또한 그 신앙의 증언이 가능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일찍부터 아나뱁티스트 전통이 보여왔던 신앙의 자유 및 자유 교회의 전통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강제적이고 강압적이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진리성을 굳게 수호하며, 변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 그리고 그 성찰로부터 도출되는 자유의 실천이 아닐까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나뱁티스트의 전통은 후기 기독교 사회에 처한 오늘날의 교회에 중요한 교훈을 전수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2. 프로테스탄티즘의 위기


현대 교회의 위기 중 하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위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끄 엘륄은 말하기를 프로테스탄티즘은 이미 종말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루터와 깔뱅의 신학적 상상력은 큰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 구원론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때에 중세 1,000년 간 유지되어 왔던 가톨리 교회의 구원론의 위기와 비견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개신교 구원론이 위기를 맞은 근본 이유는 그것이 신앙과 행위, 종교와 윤리 사이의 균형을 잡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제자도의 실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이 없는 신앙, 말 뿐인 고백이 문제인 것이지요. 일찍이 이 문제는 루터 이후 독일 루터교회의 위기였으며, 깔뱅이 해결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깔뱅을 따라 청교도들은 삶의 열매를 구원의 증거로 보았는데, 하지만 그들의 성화론은 금욕주의와 율법주의로 기울고 말았습니다. 지난 500년 간 개신교회는 그들이 비판했던 가톨릭교회와 별 차이를 보이지 못했으며 심히 부끄러운 여러 죄악에 참여했습니다. 종교재판이나 노예무역, 폭력을 통한 제국주의적 기독교 선교 등이 그러한 예이지요. 특히 1, 2차 세계 대전 당시, 그리고 히틀러 정권과 아우슈비츠라는 가공할 만한 악에 직면해서 개신교회는 아무런 모범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개신교회의 도덕적 빈곤 등은 개신교 구원론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것이 본회퍼로 저급한 개신교 구원론을 ‘값싼 은혜’라고 질타하게 만들었습니다. 본회퍼의 일갈 이후 교회는 제자도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도에 대한 강조는 개신교회 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많은 선교단체에서는 제자도를 오지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쯤으로 착각합니다. 또 많은 교회에서는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것, 성경공부를 하는 것, 교회 봉사에 열심을 내는 것, 혹은 개인적 경건 생활에 헌신하는 것 등으로 오해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아나뱁티스트 신앙은 귀중한 증언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핵심 중 하나는 ‘제자도’에 대한 강조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몇몇 개신교회 내에서 논의되는 제자도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구체적이며, 근본적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제자도의 원리를 그리스도의 주권으로부터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에서 잘 찾아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주권은 개인 경건이나 교회 생활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도 양보될 수 없는 것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전적인 주권에 대한 신앙은 초대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확고한 신앙으로부터 제자도의 원리가 이끌어져 나오기 때문에 굳이 개혁교회에서 말하는 공공신학(public theology)과 같은 사회참여를 위한 신학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제자도는 다만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정직하고, 충성스러운 인정과 고백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아나뱁티스트가 강조하는 제자도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그것이 공동체라는 컨텍스트에서 실천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나뱁티스트는 공동체를 교회 제도나 조직이기 앞서 형제들의 코이노니아로 봅니다. 때문에 제자도가 개인 경건이나 제도적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 변질되지 않습니다.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공동체의 컨텍스트 내에서 사랑과 섬김, 용서, 구제, 원수 사랑 등의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오늘날 위기에 빠진 프로테스탄티즘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전통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믿습니다.


 


3. 현대적 삶의 위기


세 번째로 기억할 것은 오늘날 현대적 삶이 주는 가공할 만한 비인간성의 문제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어느 시대나 문제가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는 새로운 문제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것은 19세기에 출현한 독특한 현대 문명이 만들어 내는 문제입니다. 광범위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인류를 여지껏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생활 환경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극단적인 자본주의의 발달은 맘몬이 신으로 등극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고도로 발전된 테크놀로지는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낯설고 새로운 생활을 매일매일 갱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생활 환경이 인간 영혼과 정신, 공동체와 인간 관계에 주는 충격과 변화는 지대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비인간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가 잘 지적한 대로 지금 인간은 자신이 만든 문명에 의해 소외되고 있습니다. 문명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문명을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제 소외되었으며, 도구화되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소외는 점점 더 심각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심화되고 있습니다. 자신과의 소외, 하나님과의 소외, 이웃과의 소외, 자연과의 소외 등..


관계는 단절되고 있으며, 공동체는 해체되고 있습니다. 생태계는 위협받고 있으며, 인류 문명은 큰 위기로 치닺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기술 문명이 제공하는 얄팍한 상품과 문명의 장난감,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혐오스러운 물질적 부, 대중매체가 주는 천박한 쾌락과 선전 등에 의해서 양심은 마비되고 있으며, 의식은 신화와 허위의식에 빠져 깨어날 줄을 모릅니다. 이러한 현대의 문명은 하나님을 내쫓은 세속적 문명이요, 모든 인간과의 관계를 추상적인 계약의 관계로 바꾸어 버린 게셸 샤프트요, 자연을 착취하는 폭력적 문명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면에서 소외가 극단으로까지 치닺고 있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문명인 것이지요.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끔찍한 종말적 상황에 처해 있는 가련한 인간을 향해서 아무 것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교회도 그러한 현대 문명의 가장 큰 소비자요, 수혜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는 완전히 일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나뱁티스트 신앙이 중요한 이유는 결국 그 모든 문제의 해법을 복음의 능력에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아나뱁티스트 신앙은 복음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임을 확신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충성한 제자 공동체 내에 현존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제자 공동체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안에 임하며, 그곳에서 발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아나뱁티스트에게 있어서 교회 공동체는 세상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대조사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둠 속의 빛이요, 부패한 세상 속의 소금이며, 산 위의 동네로 구별된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교회 공동체를 세상과 구별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성령의 능력이라고 믿었으며, 이로 인해 교회 공동체는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사회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참된 사랑과 섬김, 그리고 화해와 평화라는 표지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그 옛날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에서 명확히 드러났던 가르침이며, 아나뱁티스트들이 지난 500년 간 실험하며 결실을 맺었던 것들이며,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복음입니다.


 


저는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오늘날 아나뱁티스트 신앙은 복음을 증언하고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고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고 믿습니다. 물론 이러한 증언과 고백이 자칫 자기의를 자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메마른 율법주의나 도덕주의로 굳어질 수 있으며, 또한 위선과 가식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나뱁티스트의 신앙이 현대 교회와 현대 사회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기회는 또한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내부 전통에서도 큰 자극과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증언을 현대인이 알아 들을 수 있게 증거하기 위해서는 아나뱁티스트 전통을 되돌아보게 하며, 이를 재해석하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기회 앞에서 우리는 섣부르게 효과와 결과에 함몰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무작정 행동만을 강조하는 행동주의로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 앞에 신실하게 반응하는 것 또한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와 아나뱁티스트 신앙


 


한국 교회의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포함하면 200년이 조금 넘고, 개신교회의 역사만 보면 100년이 조금 넘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외관상으로 보면 한국 교회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은 교회며, 완전히 자립한 교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한국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1. 한국 교회의 위기


한국 교회의 위기는 세계 교회의 위기와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문제는 한국 교회의 독특한 사정과 함께 세계 교회의 상황과 같이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다른 글에서 현대 교회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개념, 곧 국가교회의 해체와 후기 기독교 사회의 도래, 프로테스탄티즘의 위기, 현대적 삶의 위기 등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한국 교회의 위기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 한국에서의 국가 교회의 해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위기


국가교회의 해체와 후기 기독교 사회의 도래는 한국 교회에도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 역사에서 국가 교회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세 명의 개신교 대통령과 한 명의 가톨릭 대통령을 배출했습니다. 그 이외의 대통령도 큰 교세를 자랑하는 한국 교회와 다양한 형태로 협력을 꾀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지금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과 MB 정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기독교와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회는 무조건 이대통령과 MB 정부를 지지하고 있으며, MB 정부 역시 기독교에 다양한 형태로 특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많은 정부 관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또 많은 목사들이 다양한 형태로 정치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김진홍 목사를 주축으로 하는 뉴라이트는 지금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 교회를 중세 시대의 국가 교회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특히 MB 정부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독재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한국 국민은 이명박 대통령과 MB 정부에 분노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분노를 품고 있습니다. 때문에 MB 정권이 끝나면 한국 교회는 심각한 공격을 받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후기 기독교 사회의 도래는 한국 교회의 전도와 선교에도 큰 도전을 던지고 있습니다. 19세기에 미국을 통해서 한국에 들어온 복음은 기본적으로 2차 대각성 시대의 복음이며, 미국 교회의 근본주의적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복음 전파 방식은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적이고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지난 100여년간 복음 전도와 선교를 같은 방식으로 해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엄청난 물량, 조직,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공격적으로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 이러한 전도 방식은 큰 물의를 일으키게 됩니다. 최근 물의를 빚었던 아프카니스탄 인질사건이나 선교 단체 인터콥이 물의를 일으키는 것, 또한 MBC와 같은 방송 몇 차례 비판보도한 적이 있는 몰상식한 노방전도, 무례한 방문전도, 거대한 전도초청집회 등이 그러한 예들입니다. 하지만 데이빗 옥스버거의 말대로 “위대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고 전도명령을 수행하면 단지 큰 소란만 피울 뿐”입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엄청나게 성장했던 비결이 바로 이러한 무례하고 공격적인 전도와 선교 방식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자신들의 전도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향해 던지는 비난을 주님을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 교회는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 복음 증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교회가 이를 깨닫기 전까지 한국 교회는 절대로 지금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제자도의 실종과 명목상의 신자의 증가


한국 교회의 위기는 현대 프로테스탄티즘의 위기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교회 역사상 가장 빠른 성장을 했습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복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큰 시험거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양적인 성장에만 너무 매진한 나머지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등한히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열매가 바로 메가처치 현상입니다.


메가처치 현상은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한국에 와서 특히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전세계 10대 교회 중 무려 5-6개가 한국에 있습니다. 한국에서 메가처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대략 198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3,000명 이상 모이는 메가처치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메가처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교회가 메가처치로 성장할 수 있으며, 또 메가처치로 성장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때문에 현재 한국에는 약 5%내외의 메가처치가 있지만 나머지 95%의 교회도 모두 메가처치를 지향하고 있는 메가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게 온갖 형태의 교회성장 도구와 이론이 한국 교회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오로지 교회성장만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메가처치 현상은 한국 교회를 명목상의 신자로 가득 차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세상과 교회는 아무런 차이도 없으며, 오히려 세상보다 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메가처치를 지향하는 한국 교회는 제자도에 대해서 거의 강조하지 않습니다. 제자도를 강조하는 교회도 결국 진짜 목표는 양적 성장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건강함은 찾아볼 수 없으며, 교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최악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개신교인이 가톨릭 교회와 불교로, 혹은 무종교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인구는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2000년 초반부터 메가처치 패러다임이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 개신교인의 수가 줄어들면서 교회 간의 성장 경쟁은 더욱 치열해 지게 된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에 대한 인식은 더욱 나빠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는 더욱 성장을 위해 올인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악순환입니다.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1980년 이후 소위 건강한 메가처치로 역할 모델을 자처해 왔던 교회들이 문제를 드러낸 것입니다. 온OO 교회는 전국과 전 세계에 체인점을 만들어 온OO 제국을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사OO 교회는 최근 2000억이 넘는 돈을 들여서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리더쉽을 발휘하던 메가처치가 본을 보이지 못하면서 메가처치 패러다임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방향성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현대적 삶의 위기


한국 사회는 지난 100여년 간 너무도 빠르게 현대화되고 산업화되었습니다. 약 100여년 전 한국은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 불리워졌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서구 열강에 의한 강제 개화, 일본의 식민통치, 6.25전쟁, 그리고 산업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21세기 초 한국에서 100여년 전 조선의 모습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빠른 변화 때문에 서구 사회가 겪고 있는 현대 문명의 질병이 한국 사회에 고스란히 전염되었습니다.


거기에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미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겨난 문제까지 함께 안게 되었습니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공동체는 해체되고 정신구조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교적 전통이 해체되면서 사회적 규범도 붕괴되었습니다. 사회적 규범이 사라진 한국 사회에서는 아노미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법도 지키지 않고 오직 출세와 성공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한국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상황에 맞는 새로운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아직 전통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세계관과 규범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신구교를 포함해서 기독교 인구가 30%나 되지만 기독교는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 사회 안의 대립과 갈등도 점차 첨예해 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로서 남과 북이 늘 대립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 정치적 좌파와 우파의 갈등, 기업과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의 갈등, 강남과 강북의 갈등, 기성세대와 젊은이 세대 등의 갈등도 점차 심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탈북자의 증가 및 결혼과 직업을 통한 이주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사회는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문화 간의 대립과 갈등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교회는 이러한 문제들 앞에 아무런 역할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한국 교회는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골칫거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2.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시작


많은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한국 교회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찾기에 분주합니다. 그리고 많은 대안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현재 제시되고 있는 여러 가지 대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루터-깔뱅의 신학적 패러다임 안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오순절 성령 운동을 통해서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대안들은 지금 우리가 처한 독특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사회 참여나 교회 개혁 운동, 공동체 운동, 영성 운동 등을 통해서 대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역시 참다운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아나뱁티스트 신앙은 한국 교회의 위기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저는 아나뱁티스트 신앙이 위기에 처한 현대 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대단히 많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MB 정권 이후 한국 교회는 마치 중세 가톨릭 교회가 받았던 것과 비슷한 공격과 비난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때에 한국 교회는 국가와 과감하게 단절했던 아나뱁티스트의 전통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증언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국 교회는 아나뱁티스트가 복음을 증언하는 방식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친 양적 성장의 추구와 메가처치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도 아나뱁티스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는 신자의 교회 전통과 제자도를 강조해 왔으니까요. 그리고 현대적 삶의 심각한 비인간화 현상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아나뱁티스트 전통이 강조했던 사랑과 코이노니아의 공동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극단적 대립과 충돌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아나뱁티스트의 평화교회 전통과 화해 사역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한국 교회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 중에 이러한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에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아나뱁티스트 선교사도 없이 스스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예수촌 교회나 KAC도 사실은 아나뱁티스트 선교사에 의한 선교의 결과라기보다는 자생적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점차 많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주목할 만한 현상은 기독교 출판 시장에서 아나뱁티즘의 관점으로 씌어진 책들이 대단히 많이 출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KAP를 통해서도 많은 책이 출판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이 일반 기독교 출판사를 통해서 출판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정치학」「가정교회 세우기」「외길영성」「급진적 기독교」「하나님 나라의 윤리학」「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 등 엄청나게 많은 아나뱁티스트 관련 서적이 일반 출판사를 통해서 번역되어 시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저를 비롯한 많은 한국의 목사, 신학자도 아나뱁티즘의 관점으로 책을 쓰고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약 10년 전만 해도 아나뱁티스트는 이단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현재 많은 사람들은 아나뱁티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메노나이트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생소하게 여기고 있지만 아나뱁티스트에 대해서는 꽤 익숙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일이 성령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믿습니다.


 


3.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국 교회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필요로 하는 도움은 미전도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것과는 종류가 좀 다릅니다. 한국 교회는 교회와 신자는 넘쳐나지만 사실상 선교지나 다름없는 교회이지요. 이것은 마치 16세기 유럽의 상황과 흡사합니다. 당시 유럽은 교회와 신자로 뒤덮혀 있었지만, 초기 아나뱁티스트가 봤을 때 유럽은 선교지였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에는 1개의 메노나이트 교회와 1개의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존재하고 있으며, 협력기관인 KAC가 하나 있을 뿐입니다. 이 분들은 그동안 많은 일들을 감당해 오셨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역사를 감당하기에는 미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미의 형제들은 한국 교회가 너무 교회가 많고, 신자가 많다며 선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상황을 주의깊게 살펴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시대의 징조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며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이 유럽을 선교지로 보았던 그 모범을 잊어버린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필요는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하기도 하고, 교회나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안수를 받고 싶은 데 안수 받을 곳이 없으니 어서 안수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기도 하고, 목회 자료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먼저 필요한지 모를 정도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 교회가 북미의 형제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위기입니다. 한문으로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幾回)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는 한편으로는 위험한 상황이고, 한편으로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위기가 한국 교회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성령의 역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이 일으킨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모든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1-01-15 09:16:54 KAF자료실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