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기독교」가 말하는 제 3의 길
저자: 베리 칼렌(Barry L. Callen)
역자: 배덕만
출판사: 대장간
급진적 기독교. 뒤에 나오는 기독교라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앞에 나오는 급진적이라는 말은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설명만 필요한 게 아니라 고민도 좀 해야 한다. 급진적이라는 말이 던져주는 화두가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급진적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래디칼(Radical)이라는 말은 본래 ‘철저한’, 혹은 ‘근본적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본래 Radical이라는 말의 어원에는 ‘뿌리’(root)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근본부터 따지고 드는 태도를 급진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슨 문제이든지 뿌리, 근원을 건드리면 나긋나긋하게 넘어갈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것이 원칙을 몰라서 못하는 경우보다 원칙을 따르기 힘든 경우가 훨씬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원칙을 따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과격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래서 급진주의자들이라는 말 속에는 과격하다는 의미가 포함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회 안에서 급진주의, 급진적이라는 말은 주로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곤 한다. 하나는 성경의 본문을 시대의 상황에 근거해서 해석하려는 입장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특정한 구절의 문자적 의미보다는 성경 전체의 가치나 이념을 따져서 보편 인간의 문제들, 즉 소외, 불평등, 박해 등의 문제들에 접근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이들의 성경해석은 기존의 해석과 판이하게 다른 경우가 많다. 이들의 무게 중심은 인간 실존의 문제에 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준거가 된다.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성경에서 구체적인 교훈을 얻기 보다는 보다 크고 보편적인 방향을 제시받는 것에서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을 가급적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입장이다. 이들은 시대의 변화보다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더 비중을 둔다. 그래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성경의 교훈을 그대로 현실 속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이들은 인간 사회의 문제들은 성경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세상의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가장 큰 전략은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고 본다. 이들에게는 성경이 전략이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 실천을 위해 읽는 경향이 강하다. 교리적인 논쟁이나 첨예한 다툼은 이들의 주요 관심 사항이 아니다. 단순한 해석과 실천에 더 큰 비중을 둔다.
그런데 급진적이라는 말은 스스로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가 붙여준 이름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누가 붙여준 것일까? 스스로 정통이라는 명분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붙여준 것이다. 그러면 그 정통이라는 명분은 누가 부여한 것일까?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힘을 얻는 것일까?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 다수의 힘이 정통이라는 명분에 힘을 실어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정통의 힘이 소수를 향해서 어떤 식으로 표출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아연실색하게 된다. 정통이라는 명분을 쥔 사람들이 자기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무리들에 대해서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고 무수한 살육을 자행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루터와 쯔빙글리의 손에 죽어간 재침례교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영국의 분리주의자들이 겪었던 그 박해가 얼마나 잔인한 것이었는지를 쉽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 당시에 소수였고, 급진적이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야 했던 자들의 후손이 쓴 책이다. 그러니만큼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정통이라는 명분을 자자손손 물려받고 있는 교회에게는 불편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급진적인 전통을 물려받고도 이름뿐인 후손들에게 더 뼈아픈 내용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다시 한 번 근원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1장의 제목이 ‘주님과 함께 변두리에 머물라’이다. 벌써부터 소수파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현실에 대한 약간은 비관적인 태도, 그게 이들 급진주의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 급진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세상과 대립하는 곳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결코 다수가 될 수 없다는 어떤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이들이 초창기에 정통이라는 이름의 교회에게 받았던 박해의 기억 때문에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당시에 국가권력이나 가톨릭이나, 심지어 교회 개혁의 주축들에게도 박해를 받아야 했고, 그 어디에서도 이들의 주장이 용납되지 않았던, 그리고 그 세월이 만만치 않게 길어야 했던 경험이 이런 생각의 모판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오히려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통전성을 보다 온전하게 형성시키고, 복음 선포의 자유를 회복할 즐거운 기회라고 말한다(p.49). 이게 무슨 말인가? 기독교이 영향력이 약화된 지금이 오히려 기회라니?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은 유럽이나 미국의 상황이다. 이 나라들은 기독교 국가임을 공식적으로 표방하고 있고, 어떤 나라에서는 국가가 교회 목회자에게 생활비를 주기도 하고, 대통령 취임식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기도 하지만, 교회가 세속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에 밀려서 그 힘이 약화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엔 그런 기독교 국가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건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발생한 교회의 타락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무너져야 하는 체제인 것이다.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고, 높은 공직에 오르고, 사업에 성공해야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화된다는 생각은 이들에게 비성경적이고 심하게 말해서 사탄적인 생각일 뿐이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오로지 복음을 통해서만 드러날 뿐, 다른 평가기준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고위 공직과 세상에서의 사업의 성공을 추구하다가 순수한 신앙을 상실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들의 무게 중심은 표면적인데 있지 않고 본질적인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오히려 기독교 국가의 영향력이 약화된 지금이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기회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2장의 제목은 그래서 ‘성령과 함께 시작하라’이다. 이 책의 35페이지를 보면 ‘몬타니즘’에 대한 하워드 스나이더의 평가가 나온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이 몬타니즘에 대해서 “최초의 은사주의 운동”이며, “갱신의 물줄기가 처음으로 널리 터져 나온 사건”이며, “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던 제도화 경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라고 말한다. 어디 하워드 스나이더 뿐이겠는가?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도 몬타니즘의 지도자였던 몬타누스를 그 시대의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고, 몬타니즘이 초대 교회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몬타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였다. 이미 당시에 영지주의를 중심으로 한 여러 이단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교회는 주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주교의 권위가 신성불가침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되고, 교회 안에서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나 예언 등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지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몬타니즘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와 성령이 주시는 예언을 긍정하고,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지도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몬타니즘은 교회가 점차 멀리하던 카리스마의 전통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개방성이 정통 교회 입장에서는 위험한 것이었다.
하워드 스나이더나 요한 웨슬레가 보기에 몬타니즘의 모습 중에서 그런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개방성은 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었다. 그런데 교회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그 전통은 세월이 갈수록 굳어졌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성서원리’를 출발점으로 삼았으나, 그들의 관점에서, 신적 권위는 루터의 ‘오직 성서만으로’보다는 ‘성서와 성령 모두’에 기초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p.59)
루터가 ‘오직 성경으로’를 외쳤을 때, 그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령은 교회 갱신에 관한한 이미 그 설 자리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총신대 김정우 교수가 쓴 “구약의 성령론-서론”을 보면, 루터와 칼빈이 모두 성령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반면에 저자는 기독교의 일치는 모든 신자가 하나의 공통된 교리를 고백한다고 실현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유일한 참된 희망은 “불의 일치”(Fire Unity)라고 하는 발튼 스톤의 주장을 소개한다(p.63). 이렇게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이유는 “과도한 감정의 분출은 분명히 부정적”이지만, “성령 없는 신앙이 더 심각한 악”이기 때문이다(p.63).
‘신자들의 교회’ 전통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듭남과 거듭난 신자의 삶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실천하는 신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p.69). 바로 3장에서 이 성령의 공동체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3장의 제목은 ‘비전 바라보기’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전’은 교회에 대한 비전이다. 그리고 루터의 교회에 대한 비전과 아나뱁티스트의 교회에 대한 비전이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그 비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고백교회”와 “지역교회”이다. 고백교회란 자발적인 신앙고백을 통해 구성된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고, 지역교회란 특정한 지역에 살기 때문에 구성된 교회를 말한다. 루터가 교회 개혁을 했을 때에도 사람들에게는 교회를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심지어 가톨릭을 선택할지 개신교를 선택할지에 대한 자유도 없었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의 신앙을 무조건 따라야 했다. 통치자의 통제를 받는 이런 교회를 지역교회 혹은 국가교회라고 부른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런 지역교회 혹은 국가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하게 고백교회를 지향했던 것이고 그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영주들은 자기 백성들이 신앙을 선택할 자유를 누리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만약에 백성들이 로마 가톨릭을 선택해버리면 그 영주는 꼼짝없이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세례명부가 곧바로 세금징수의 자료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그 편리함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저자는 루터의 글을 인용하면서 루터가 고백교회와 지역교회를 통합하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랬기 때문에 루터는 정치권력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고, 결국 루터의 비전은 국가교회라는 방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백교회 전통 혹은 신자의 교회 전통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 중에 고백교회는 지나치게 세상과의 분리를 강조한다는 것이 있다. 그들은 복음의 순수성을 외치지만 현실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에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없고, 고립된 공동체로만 머물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이 점이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첨예한 논쟁이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저자가 인용하는 말을 먼저 들어보자.
“교회에는 사회적 전략이 없다. 교회가 사회적 전략이다.”(p.101)
이 말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책에 나오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의 말이다. 교회가 가장 교회다울 때 교회는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성경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을 구현하고, 세상이 할 수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성경의 교훈을 실천해나갈 때,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어떤 전략보다 탁월한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며, 가장 효과적으로 세상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어떻게 트집 잡겠는가?
그런데 교회가 사회적 전략이라는 말을 협의의 의미로 보면 안된다. 실제로 고백교회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메노나이트 같은 경우에, 이들은 교회적인 차원에서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의 첨단에 서서 활동하기도 하고, 세계의 기아문제나 지역 분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 정부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이다. 이해가 되는가? 가장 교회다운 교회, 가장 복음적인 교회를 추구하는 자들이 정통을 자부하는 교회들에서 볼 때는 빨갱이 같은 짓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 우리는 무엇이 정통인지를 심각하게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물어야 한다. 성경 말씀을 가장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무리들이 어떻게 가장 실천적인 삶을 추구하며, 그것도 세상의 가장 심각하고 정치적인 문제에 거리낌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반대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교회가 가능한 것은 이들에게는 첨예한 교리논쟁이 아니라 실천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문제를 4장에서 다루고 있다.
4장의 제목은 ‘믿음의 확증: 신학’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4장을 시작한다.
“신자들의 교회 전통은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며, 기존의 신학이 빈번하게 성서에서 일탈하여, 신실한 신자들을 박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인식과 함께 자신의 신학 작업을 시작한다.”(p.115)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신학이 아니라 실천이다. 신학은 최소한의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전통 속에서는 “특정한 신학개념이나 어떤 개혁자 혹은 대표적 교단의 가르침”에 의존하지도, 그리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 속한 교회에 신학이 없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신학자가 없는 것도 아니다. 신학교도 있고, 신학자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신학교나 교회의 무게 중심은 실천에 있다. 그러다보니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서 신학이란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영성’이라고 정의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p.117).
마치 신학을 소홀히 하는 듯한 이런 말들을 듣고 분개하고 못마땅해 할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니케아나 칼케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가 니케아나 칼케돈에서 싸웠던 것만큼 치열하게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을 두고 치열하게 싸워본 적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물어 보아야 한다. 단언하건대, 만약에 교회가 그렇게 했더라면 교회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몰트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김균진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예수의 예언자적 선포와 땅 위의 활동이 사도신경에도 언급되지 않으며 니케아 신앙고백에도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와 같이 일면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동정녀 탄생과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일어난 그의 죽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를 교의학의 역사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도 이에 관하여 전통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는다. 니케아 신앙고백은 ‘인간이 되었다’고 고백하며, 사도신경은 ‘고난을 당하였다’고 말할 뿐이다.”(p.86-87)
만약에 우리가 지금의 사도신경이 아니라 이런 고백을 주일마다 했다면 어땠을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으며,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질 받던 삭개오를 만나주셨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버렸던 제자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으며,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도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처럼 저희도 살기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하옵소서.”
무엇이 신앙에 대한 고백인가? 정확한 교리를 자구대로 잘 암송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고백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 신앙의 고백인가? 둘 다 필요하다. 어느 하나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는 후자를 거의 선택하지도 눈여겨 보지도 않았다.
행위가 인식을 지배한다.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는 점이다.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서 ‘따름’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올바른 따름이 있을 때 올바른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이 쓸데없는 사색에 빠지지 않도록 자주 경계하고, ‘나를 따르라’며 그들에게 도전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말하는 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행위의 실패는 언제나 존재나 인식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행위 인식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고들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더 깊고 올바른 인식은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자식을 낳아보아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고 하지 않는가? 교회가 그동안 올바로 믿기 위해서 무수하게 강조했던 올바른 인식이 결국 인식의 차원에만 머물고 말았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루터가 그토록 강조했던 법정적 칭의가 결국 “가치와 행동을 결정적으로 교정하지 않은 채” 그것에만 만족하도록 유혹하는 경험을 우리는 알고 있다(p.136).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 나오는 몰트만의 말을 인용해보자.
“예수를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론의 교리를 배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뒤를 따르는 실천 속에서 그를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p.74)
이것을 저자는 “복종의 해석학”이라고 말한다(p.141). 저자는 이 철저한 실천의 문제를 5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래서 5장의 제목이 ‘믿음의 삶: 기독교적 제자도’이다.
제자도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먼저 부닥치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나 교인들의 부도덕한 모습을 보고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는 것이지 사람을 바라보면 안 된다.’ 이 말을 좀 더 유식한 말로 바꾸면 ‘가시적인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비가시적인 교회는 완전하다’가 될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말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가 어디 있겠으며,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불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해야 상처받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이런 핑계를 대는 교회를 향해서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 왔다는 말이냐.’
사실 이런 지적은 치욕적이다. 이건 마치 가장 아름다운 옷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핑계로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행진을 하는 어리석은 왕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런 걸 자가당착이라고 한다. 자기도 믿지 않는 말을 남보고 믿으라는 격이다. 우리 스스로도 교회가 도저히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없을 지경이라는 걸 알면서도, 참된 교회는 본래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어거지를 부리면서, 그 부끄러움을 가릴 만한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채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마틴 부버는 그걸 꼬집고 있다. 아마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니들 눈에는 보이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자들의 교회 전통은, 참된 교회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개념에 의지하여, 가시적 교회이 명백한 불완전함을 정당화하는 일에 불편함을 느껴왔다.”(p.161)
가시적인 교회의 불완전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라는 말이다. “정말로 가시적이고 실재로 그리스도를 닮은 신자들의 되어선 안 되는가?”(p.161) 우리는 이런 질문 조차 던져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저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현재 자신의 삶 속에 도래하는 하나님 통치(평화, 사랑, 기쁨, 자유, 평등, 그리고 일치)의 특징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p.163).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핑계가 되어서도 안 된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런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적인 실천을 가로 막아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제자들에게 ‘따르라’ 명령하신 분의 의도를 따르면서 파악하고, 성령 안에서 그런 능력을 배양해야 마땅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서 교회가 추방과 치리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거룩과 정결을 추구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교회가 성도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추방과 치리, 거룩과 정결, 훈련. 이런 말이 낯설다는 것이 비정상임을 느껴야 한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교단의 교회법이나 규약 안에 추방과 치리의 조항이 있음을 알고 있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이런 조항이 사문화되어 버렸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교회의 정결보다는 인기가 더 중요하고, 교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 아버님이 신앙생활 하시던 시골 교회에서 한 번은 어느 여자 집사를 교회에서 치리해서 한 동안 교회에 출석을 금한 적이 있었다. 시어머니에게 너무 함부로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이제는 아득한 옛적 일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이 치리와 출교의 전통이 살아있다. 그들은 실제로 교단의 지시나 교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엄격하게 출교시키고 있다.
이제 마지막 6장을 살펴볼 차례이다. 6장의 제목은 ‘비전 성취: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자기 비판과 자기 반성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신자들의 교회 전통이 가지고 있는 약점과 현실적인 제약, 그리고 이미 변질되어버린 신자들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가차 없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저자는 신자들의 교회가 제도교회의 치명적 약점들에 반발하면서 역사의 의미를 상실하는 경향에 대해서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의 배타적인 경향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당신들은 제도화되지 않았는가?” 그리고는 충격적인 자료를 들이민다. 1996년에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 속한 교단인 하나님의 교회(앤더슨 파)에서 외부의 전문가에 의뢰해서 교단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을 의뢰한 일이 있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운동으로서의 특징이 거의 없고, 노쇠한 교파의 많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p.200)
이건 거의 사형선고에 가까운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앤더슨 파)는 저자가 속한 교단이었다. 저자는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 속한 교회나 교단들이 “중앙화의 유익에 대한 지적 갈망”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효과와 효율에 대한 집착이 결국 그들을 변질시켰던 것이다.
이런 뼈를 깎는 치부의 노출을 마다하지 않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오늘날 제도교회 내에 갱신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변혁적 은총에 대한 실제적이고 즉각적인 경험으로부터 솟아나는 갱신 말이다. 그런 갱신이 참되고 건설적이 되려면, 그 갱신이 성령에서 기원하고, 새 생명과 훈련된 새로운 성령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며, ‘한때 성도들에게 전달된’ (그래서 교회의 오랜 전통과 의미 있게 연결된) 믿음의 확장과 성장이어야 하고,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지금 성령과 더불어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도전적 사명은 자신의 유산에 충실하며, 동시에 오늘날의 맥락에 적합한 것이다.”(p.196).
저자는 신자들의 교회 전통이 가야 하는 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해방신학과 현대 복음주의의 중간이라고 말한다(p.214).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기도 하다.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고, 그 전통의 가치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동안 둘 사이에서 어느 한쪽만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방신학적 사회참여인가, 아니면 복음주의적인 교회이해인가? 그러나 저자는 제 3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제 3의 길이 사실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은 예전에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께서도 말씀하셨고 지향하셨던 방향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변혁과 갱신을 바라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던져주는 화두는 유익하고 흥미롭다.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는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 대해서 그동안 많이 소개되지도 못했고, 교회사 속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중만큼의 주목이나 대접도 받지 못했다. 이제는 왠지 모를 서자(庶子)같은 취급이나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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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베리 칼렌(Barry L. Callen)
역자: 배덕만
출판사: 대장간
급진적 기독교. 뒤에 나오는 기독교라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앞에 나오는 급진적이라는 말은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설명만 필요한 게 아니라 고민도 좀 해야 한다. 급진적이라는 말이 던져주는 화두가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급진적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래디칼(Radical)이라는 말은 본래 ‘철저한’, 혹은 ‘근본적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본래 Radical이라는 말의 어원에는 ‘뿌리’(root)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근본부터 따지고 드는 태도를 급진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슨 문제이든지 뿌리, 근원을 건드리면 나긋나긋하게 넘어갈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것이 원칙을 몰라서 못하는 경우보다 원칙을 따르기 힘든 경우가 훨씬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원칙을 따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과격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래서 급진주의자들이라는 말 속에는 과격하다는 의미가 포함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회 안에서 급진주의, 급진적이라는 말은 주로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곤 한다. 하나는 성경의 본문을 시대의 상황에 근거해서 해석하려는 입장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특정한 구절의 문자적 의미보다는 성경 전체의 가치나 이념을 따져서 보편 인간의 문제들, 즉 소외, 불평등, 박해 등의 문제들에 접근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이들의 성경해석은 기존의 해석과 판이하게 다른 경우가 많다. 이들의 무게 중심은 인간 실존의 문제에 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준거가 된다.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성경에서 구체적인 교훈을 얻기 보다는 보다 크고 보편적인 방향을 제시받는 것에서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을 가급적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입장이다. 이들은 시대의 변화보다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더 비중을 둔다. 그래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성경의 교훈을 그대로 현실 속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이들은 인간 사회의 문제들은 성경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세상의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가장 큰 전략은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고 본다. 이들에게는 성경이 전략이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 실천을 위해 읽는 경향이 강하다. 교리적인 논쟁이나 첨예한 다툼은 이들의 주요 관심 사항이 아니다. 단순한 해석과 실천에 더 큰 비중을 둔다.
그런데 급진적이라는 말은 스스로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가 붙여준 이름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누가 붙여준 것일까? 스스로 정통이라는 명분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붙여준 것이다. 그러면 그 정통이라는 명분은 누가 부여한 것일까?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힘을 얻는 것일까?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 다수의 힘이 정통이라는 명분에 힘을 실어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정통의 힘이 소수를 향해서 어떤 식으로 표출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아연실색하게 된다. 정통이라는 명분을 쥔 사람들이 자기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무리들에 대해서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고 무수한 살육을 자행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루터와 쯔빙글리의 손에 죽어간 재침례교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영국의 분리주의자들이 겪었던 그 박해가 얼마나 잔인한 것이었는지를 쉽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 당시에 소수였고, 급진적이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야 했던 자들의 후손이 쓴 책이다. 그러니만큼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정통이라는 명분을 자자손손 물려받고 있는 교회에게는 불편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급진적인 전통을 물려받고도 이름뿐인 후손들에게 더 뼈아픈 내용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다시 한 번 근원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1장의 제목이 ‘주님과 함께 변두리에 머물라’이다. 벌써부터 소수파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현실에 대한 약간은 비관적인 태도, 그게 이들 급진주의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 급진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세상과 대립하는 곳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결코 다수가 될 수 없다는 어떤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이들이 초창기에 정통이라는 이름의 교회에게 받았던 박해의 기억 때문에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당시에 국가권력이나 가톨릭이나, 심지어 교회 개혁의 주축들에게도 박해를 받아야 했고, 그 어디에서도 이들의 주장이 용납되지 않았던, 그리고 그 세월이 만만치 않게 길어야 했던 경험이 이런 생각의 모판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오히려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통전성을 보다 온전하게 형성시키고, 복음 선포의 자유를 회복할 즐거운 기회라고 말한다(p.49). 이게 무슨 말인가? 기독교이 영향력이 약화된 지금이 오히려 기회라니?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은 유럽이나 미국의 상황이다. 이 나라들은 기독교 국가임을 공식적으로 표방하고 있고, 어떤 나라에서는 국가가 교회 목회자에게 생활비를 주기도 하고, 대통령 취임식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기도 하지만, 교회가 세속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에 밀려서 그 힘이 약화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엔 그런 기독교 국가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건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발생한 교회의 타락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무너져야 하는 체제인 것이다.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고, 높은 공직에 오르고, 사업에 성공해야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화된다는 생각은 이들에게 비성경적이고 심하게 말해서 사탄적인 생각일 뿐이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오로지 복음을 통해서만 드러날 뿐, 다른 평가기준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고위 공직과 세상에서의 사업의 성공을 추구하다가 순수한 신앙을 상실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들의 무게 중심은 표면적인데 있지 않고 본질적인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오히려 기독교 국가의 영향력이 약화된 지금이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기회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2장의 제목은 그래서 ‘성령과 함께 시작하라’이다. 이 책의 35페이지를 보면 ‘몬타니즘’에 대한 하워드 스나이더의 평가가 나온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이 몬타니즘에 대해서 “최초의 은사주의 운동”이며, “갱신의 물줄기가 처음으로 널리 터져 나온 사건”이며, “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던 제도화 경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라고 말한다. 어디 하워드 스나이더 뿐이겠는가?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도 몬타니즘의 지도자였던 몬타누스를 그 시대의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고, 몬타니즘이 초대 교회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몬타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였다. 이미 당시에 영지주의를 중심으로 한 여러 이단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교회는 주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주교의 권위가 신성불가침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되고, 교회 안에서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나 예언 등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지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몬타니즘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와 성령이 주시는 예언을 긍정하고,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지도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몬타니즘은 교회가 점차 멀리하던 카리스마의 전통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개방성이 정통 교회 입장에서는 위험한 것이었다.
하워드 스나이더나 요한 웨슬레가 보기에 몬타니즘의 모습 중에서 그런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개방성은 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었다. 그런데 교회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그 전통은 세월이 갈수록 굳어졌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성서원리’를 출발점으로 삼았으나, 그들의 관점에서, 신적 권위는 루터의 ‘오직 성서만으로’보다는 ‘성서와 성령 모두’에 기초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p.59)
루터가 ‘오직 성경으로’를 외쳤을 때, 그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령은 교회 갱신에 관한한 이미 그 설 자리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총신대 김정우 교수가 쓴 “구약의 성령론-서론”을 보면, 루터와 칼빈이 모두 성령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반면에 저자는 기독교의 일치는 모든 신자가 하나의 공통된 교리를 고백한다고 실현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유일한 참된 희망은 “불의 일치”(Fire Unity)라고 하는 발튼 스톤의 주장을 소개한다(p.63). 이렇게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이유는 “과도한 감정의 분출은 분명히 부정적”이지만, “성령 없는 신앙이 더 심각한 악”이기 때문이다(p.63).
‘신자들의 교회’ 전통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듭남과 거듭난 신자의 삶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실천하는 신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p.69). 바로 3장에서 이 성령의 공동체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3장의 제목은 ‘비전 바라보기’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전’은 교회에 대한 비전이다. 그리고 루터의 교회에 대한 비전과 아나뱁티스트의 교회에 대한 비전이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그 비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고백교회”와 “지역교회”이다. 고백교회란 자발적인 신앙고백을 통해 구성된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고, 지역교회란 특정한 지역에 살기 때문에 구성된 교회를 말한다. 루터가 교회 개혁을 했을 때에도 사람들에게는 교회를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심지어 가톨릭을 선택할지 개신교를 선택할지에 대한 자유도 없었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의 신앙을 무조건 따라야 했다. 통치자의 통제를 받는 이런 교회를 지역교회 혹은 국가교회라고 부른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런 지역교회 혹은 국가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하게 고백교회를 지향했던 것이고 그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영주들은 자기 백성들이 신앙을 선택할 자유를 누리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만약에 백성들이 로마 가톨릭을 선택해버리면 그 영주는 꼼짝없이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세례명부가 곧바로 세금징수의 자료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그 편리함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저자는 루터의 글을 인용하면서 루터가 고백교회와 지역교회를 통합하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랬기 때문에 루터는 정치권력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고, 결국 루터의 비전은 국가교회라는 방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백교회 전통 혹은 신자의 교회 전통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 중에 고백교회는 지나치게 세상과의 분리를 강조한다는 것이 있다. 그들은 복음의 순수성을 외치지만 현실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에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없고, 고립된 공동체로만 머물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이 점이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첨예한 논쟁이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저자가 인용하는 말을 먼저 들어보자.
“교회에는 사회적 전략이 없다. 교회가 사회적 전략이다.”(p.101)
이 말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책에 나오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의 말이다. 교회가 가장 교회다울 때 교회는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성경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을 구현하고, 세상이 할 수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성경의 교훈을 실천해나갈 때,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어떤 전략보다 탁월한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며, 가장 효과적으로 세상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어떻게 트집 잡겠는가?
그런데 교회가 사회적 전략이라는 말을 협의의 의미로 보면 안된다. 실제로 고백교회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메노나이트 같은 경우에, 이들은 교회적인 차원에서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의 첨단에 서서 활동하기도 하고, 세계의 기아문제나 지역 분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 정부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이다. 이해가 되는가? 가장 교회다운 교회, 가장 복음적인 교회를 추구하는 자들이 정통을 자부하는 교회들에서 볼 때는 빨갱이 같은 짓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 우리는 무엇이 정통인지를 심각하게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물어야 한다. 성경 말씀을 가장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무리들이 어떻게 가장 실천적인 삶을 추구하며, 그것도 세상의 가장 심각하고 정치적인 문제에 거리낌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반대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교회가 가능한 것은 이들에게는 첨예한 교리논쟁이 아니라 실천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문제를 4장에서 다루고 있다.
4장의 제목은 ‘믿음의 확증: 신학’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4장을 시작한다.
“신자들의 교회 전통은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며, 기존의 신학이 빈번하게 성서에서 일탈하여, 신실한 신자들을 박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인식과 함께 자신의 신학 작업을 시작한다.”(p.115)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신학이 아니라 실천이다. 신학은 최소한의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전통 속에서는 “특정한 신학개념이나 어떤 개혁자 혹은 대표적 교단의 가르침”에 의존하지도, 그리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 속한 교회에 신학이 없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신학자가 없는 것도 아니다. 신학교도 있고, 신학자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신학교나 교회의 무게 중심은 실천에 있다. 그러다보니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서 신학이란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영성’이라고 정의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p.117).
마치 신학을 소홀히 하는 듯한 이런 말들을 듣고 분개하고 못마땅해 할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니케아나 칼케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가 니케아나 칼케돈에서 싸웠던 것만큼 치열하게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을 두고 치열하게 싸워본 적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물어 보아야 한다. 단언하건대, 만약에 교회가 그렇게 했더라면 교회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몰트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김균진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예수의 예언자적 선포와 땅 위의 활동이 사도신경에도 언급되지 않으며 니케아 신앙고백에도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와 같이 일면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동정녀 탄생과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일어난 그의 죽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를 교의학의 역사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도 이에 관하여 전통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는다. 니케아 신앙고백은 ‘인간이 되었다’고 고백하며, 사도신경은 ‘고난을 당하였다’고 말할 뿐이다.”(p.86-87)
만약에 우리가 지금의 사도신경이 아니라 이런 고백을 주일마다 했다면 어땠을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으며,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질 받던 삭개오를 만나주셨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버렸던 제자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으며,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도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처럼 저희도 살기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하옵소서.”
무엇이 신앙에 대한 고백인가? 정확한 교리를 자구대로 잘 암송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고백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 신앙의 고백인가? 둘 다 필요하다. 어느 하나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는 후자를 거의 선택하지도 눈여겨 보지도 않았다.
행위가 인식을 지배한다.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는 점이다.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서 ‘따름’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올바른 따름이 있을 때 올바른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이 쓸데없는 사색에 빠지지 않도록 자주 경계하고, ‘나를 따르라’며 그들에게 도전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말하는 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행위의 실패는 언제나 존재나 인식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행위 인식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고들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더 깊고 올바른 인식은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자식을 낳아보아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고 하지 않는가? 교회가 그동안 올바로 믿기 위해서 무수하게 강조했던 올바른 인식이 결국 인식의 차원에만 머물고 말았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루터가 그토록 강조했던 법정적 칭의가 결국 “가치와 행동을 결정적으로 교정하지 않은 채” 그것에만 만족하도록 유혹하는 경험을 우리는 알고 있다(p.136).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 나오는 몰트만의 말을 인용해보자.
“예수를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론의 교리를 배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뒤를 따르는 실천 속에서 그를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p.74)
이것을 저자는 “복종의 해석학”이라고 말한다(p.141). 저자는 이 철저한 실천의 문제를 5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래서 5장의 제목이 ‘믿음의 삶: 기독교적 제자도’이다.
제자도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먼저 부닥치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나 교인들의 부도덕한 모습을 보고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는 것이지 사람을 바라보면 안 된다.’ 이 말을 좀 더 유식한 말로 바꾸면 ‘가시적인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비가시적인 교회는 완전하다’가 될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말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가 어디 있겠으며,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불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해야 상처받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이런 핑계를 대는 교회를 향해서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 왔다는 말이냐.’
사실 이런 지적은 치욕적이다. 이건 마치 가장 아름다운 옷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핑계로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행진을 하는 어리석은 왕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런 걸 자가당착이라고 한다. 자기도 믿지 않는 말을 남보고 믿으라는 격이다. 우리 스스로도 교회가 도저히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없을 지경이라는 걸 알면서도, 참된 교회는 본래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어거지를 부리면서, 그 부끄러움을 가릴 만한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채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마틴 부버는 그걸 꼬집고 있다. 아마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니들 눈에는 보이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자들의 교회 전통은, 참된 교회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개념에 의지하여, 가시적 교회이 명백한 불완전함을 정당화하는 일에 불편함을 느껴왔다.”(p.161)
가시적인 교회의 불완전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라는 말이다. “정말로 가시적이고 실재로 그리스도를 닮은 신자들의 되어선 안 되는가?”(p.161) 우리는 이런 질문 조차 던져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저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현재 자신의 삶 속에 도래하는 하나님 통치(평화, 사랑, 기쁨, 자유, 평등, 그리고 일치)의 특징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p.163).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핑계가 되어서도 안 된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런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적인 실천을 가로 막아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제자들에게 ‘따르라’ 명령하신 분의 의도를 따르면서 파악하고, 성령 안에서 그런 능력을 배양해야 마땅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서 교회가 추방과 치리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거룩과 정결을 추구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교회가 성도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추방과 치리, 거룩과 정결, 훈련. 이런 말이 낯설다는 것이 비정상임을 느껴야 한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교단의 교회법이나 규약 안에 추방과 치리의 조항이 있음을 알고 있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이런 조항이 사문화되어 버렸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교회의 정결보다는 인기가 더 중요하고, 교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 아버님이 신앙생활 하시던 시골 교회에서 한 번은 어느 여자 집사를 교회에서 치리해서 한 동안 교회에 출석을 금한 적이 있었다. 시어머니에게 너무 함부로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이제는 아득한 옛적 일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이 치리와 출교의 전통이 살아있다. 그들은 실제로 교단의 지시나 교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엄격하게 출교시키고 있다.
이제 마지막 6장을 살펴볼 차례이다. 6장의 제목은 ‘비전 성취: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자기 비판과 자기 반성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신자들의 교회 전통이 가지고 있는 약점과 현실적인 제약, 그리고 이미 변질되어버린 신자들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가차 없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저자는 신자들의 교회가 제도교회의 치명적 약점들에 반발하면서 역사의 의미를 상실하는 경향에 대해서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의 배타적인 경향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당신들은 제도화되지 않았는가?” 그리고는 충격적인 자료를 들이민다. 1996년에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 속한 교단인 하나님의 교회(앤더슨 파)에서 외부의 전문가에 의뢰해서 교단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을 의뢰한 일이 있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운동으로서의 특징이 거의 없고, 노쇠한 교파의 많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p.200)
이건 거의 사형선고에 가까운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앤더슨 파)는 저자가 속한 교단이었다. 저자는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 속한 교회나 교단들이 “중앙화의 유익에 대한 지적 갈망”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효과와 효율에 대한 집착이 결국 그들을 변질시켰던 것이다.
이런 뼈를 깎는 치부의 노출을 마다하지 않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오늘날 제도교회 내에 갱신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변혁적 은총에 대한 실제적이고 즉각적인 경험으로부터 솟아나는 갱신 말이다. 그런 갱신이 참되고 건설적이 되려면, 그 갱신이 성령에서 기원하고, 새 생명과 훈련된 새로운 성령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며, ‘한때 성도들에게 전달된’ (그래서 교회의 오랜 전통과 의미 있게 연결된) 믿음의 확장과 성장이어야 하고,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지금 성령과 더불어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도전적 사명은 자신의 유산에 충실하며, 동시에 오늘날의 맥락에 적합한 것이다.”(p.196).
저자는 신자들의 교회 전통이 가야 하는 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해방신학과 현대 복음주의의 중간이라고 말한다(p.214).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기도 하다.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고, 그 전통의 가치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동안 둘 사이에서 어느 한쪽만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방신학적 사회참여인가, 아니면 복음주의적인 교회이해인가? 그러나 저자는 제 3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제 3의 길이 사실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은 예전에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께서도 말씀하셨고 지향하셨던 방향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변혁과 갱신을 바라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던져주는 화두는 유익하고 흥미롭다.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는 신자들의 교회 전통에 대해서 그동안 많이 소개되지도 못했고, 교회사 속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중만큼의 주목이나 대접도 받지 못했다. 이제는 왠지 모를 서자(庶子)같은 취급이나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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