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밥티스트의 역사 - 교회와 국가(1)

by 김영현 posted Mar 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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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밥티스트의 역사 - 교회와 국가(1)

윌리암 에스텝



스위스 형제단이 신자(信者)의 침례(Baptism)를 도입함으로 제자도(弟子道)는 단체적 경험이 되었다. 이 점에서 신약의 사도적 원형을 따르는 가시적(可視的) 교회에 대한 아나밥티스트의 비젼은 역사 속에 구현되었다. 이후, 신자의 침례는 소위 Volskirchen 또는 Landeskirchen이라 불린 개혁주의 교회와 구별되는 표(標)가 되었다.

신자의 침례는 기존 교회의 거부와 영감론자(inspirationist)들에 대한 심판을 의미했다. 신자의 침례는 아나밥티스트들을 기존의 실행과 분리할 뿐 아니라, 이전에 소유한 적이 없었던 유일무이한 특성을 아나밥티스트 운동에 부여했다. 최초의 아나밥티스트 회중이 형성되면서 아나밥티슴의 특징이 드러났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단지 생각만 했던 것을 실행하였다.

이들의 독특한 교회관에서 16세기 아나밥티슴이 무엇인가를 간파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통찰력을 볼 수 있다. 리텔(Littell)이 그랬듯이, 교회학의 관점만으로도 아나밥티스트 운동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나밥티스트들은 사도적 양식 위에 ‘참된 교회’로 모여서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아나밥티스트 운동에 관해 연구한 다른 노련한 학자들은 그 본질을 다른 곳에서 발견한다. 벤더(Bender)는 아나밥티스트의 교회관이 “궁극적으로 제자도로서의 기독교 개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아나밥티슴의 본질이 제자도의 개념에서 보여진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후터파(Hutterites)에 관한 연구의 권위자인 프리트만(Friedmann)은 아나밥티슴의 본질을 “두 세상의 개념”에서 찾는다. 프리드만은 아나밥티스트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이 세상의 질서와 불가피하게 충돌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꼈다는 사실을 이 “두 세상의 개념”으로 강조한다. 아나밥티스트는 하나님의 왕국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태어난 자의 삶 가운데서 현재적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에서 미래의 소망으로 보았다.

“모든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 가운데 나타난(또는 주인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서 나타난) 왕국과, 어느 때든지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며 적절한 준비가 필요한 새로운 질서로서의 왕국이라는 이들 두 견해는 마치 이 두 개념이 복음서의 가르침의 근원인 것같이 아나밥티스트의 사상 가운데 혼합되어 있다.”

인용된 (리텔과 벤더와 프리트만이 제시한) 세 가지 다른 견해는 아나밥티스트 운동의 본질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이들 가운데 존재하는 분명한 불일치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아나밥티스트 신학은 실제적으로 밀접하게 짜여져 있다. 둘째, 세 가지 견해 가운데 어느 한 가지 견해로도 설명을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에 관한 아나밥티스트의 개념은 단순하게 단체적인 제자도(corporate discipleship)로 볼 수 있다. 또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지만, 이 땅 위에서는 세상과의 무거운 긴장 가운데서 살고 있는 신자(信者)의 형제됨(brotherhood)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들 세 가지 개념은 모두 신약성경에 대한 아나밥티스트의 해석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나밥티스트 운동에 관한 최초 문서에서, 우리는 교회에 관한 아나밥티스트의 개념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다. 1524년 중반까지, 적어도 개략적인 윤곽에서, 교회의 개념이 매우 분명했던 것이 확실하다. 1525년 1월 21일에 신자의 침례가 시작되면서 이 제자도의 개념과 교회의 개념이 모두 실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두 개념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동시에 발전되었음이 분명하다.

분명한 교회관이 없었다면, 과연 기독교 안에 아나밥티스트가 발전되었을는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제자도나 “두 세상의 개념”으로는 아나밥티슴을 밝히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 형제단(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은 토마스 아 켐피스와 다른 중세 신비주의자들이 그러했듯이 제자도의 개념을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끄는 동기(motif)로 사용했다. 그 결과, 어떠한 새로운 형태의 제도적 기독교도 생기지 않았다. 영감주의자들의 사고 속에도 두 세상에 관한 교리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약의 모형을 따르는 교회에 관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회에 관한 신약의 양식을 실행하는 것은 프랑크(Franck)와 쉬벨크펠트(Schwenckfeld))에게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호감을 주지 못했다. 비록 루터와 쯔빙글리에게 호감을 주었을지라도, 명백히 실행은 불가능했다. 아나밥티스트를 동시대의 개혁주의자들과 구분 짓는 것은 교회관이다. 이 주장은 교회의 개념 그 자체에서 아나밥티슴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개념은 반드시 여러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교회의 개념은 단순히 추상적인 신학이 아니라, 교회의 교제와 세상에 대한 태도와 관련하여 역사의 흐름 가운데 존재했던 살아있는 실체(reality)였다.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아나밥티스트 교회론의 요점은 역사 속에서 가시적 교회의 실행에 관한 것이었다. 아나밥티슴은 상대적으로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우주적 교회의 개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는 우주적 교회 개념이 아나밥티스트의 사상과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나밥티스트들 안에서 사도신경(Apostles' Creed)이 거의 만장일치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 개념을 무언(無言)으로 승인했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16세기 아나밥티스트 문헌 가운데는 불가시적인 우주적 교회를 언급하는 문서들이 많이 있다.

휘브마이어(Hubmaier)는 이 사상을 다룬 대부분의 아나밥티스트보다 더 광범위하게 다룬다. 그에 따르면 신약성경 안에 있는 “교회”라는 단어에는 우주적 교회와 지역 교회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는 우주적 교회가 “오직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연합된” 다시 태어난 모든 자들로 구성된다고 확신했다. 반면에, 지역교회는 “목자 또는 감독”의 인도자직 아래에 있는 교제(fellowship)이며, 가르침과 침례와 만찬을 위한 모임이라고 주장했다. 휘브마이어는 우주적 교회와 특정 교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어머니와 딸의 인간 관계를 언급하였다. 그는 개별적 모임은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우주적 교회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아나밥티스트의 글에서도 우주적 교회에 대한 몇 가지 언급이 있다. 그러한 참조 문헌 가운데 전형적인 것이 다음과 같은 디르크 필립스(Dirk Phillips)의 주장이다. "교회 또는 회중이란 이름은 불가시적일 뿐 아니라 가시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용된 언어가 “에클레시아” 곧 회중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이며, 회중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적용된 용어가 전도자(Ecclesiastes)이기 때문이다.” 다른 아나밥티스트들과는 달리, 디르크(Dirk)는 교회의 기원을 성육신(聖肉身) 전(前) 그리스도와 하늘의 천사들 가운데 있는 존재와 구약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는 지역에서 모이는 하나님의 가시적 회중 모임을 강조했다. 필립스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교회(functioning church)의 특성을 제자들의 지역 모임으로 분명하게 묘사하였다.

아나밥티스트들은 기능을 발휘하는 가시적인 지역교회를 다른 어느 개념보다도 중요시하여 강조했다. 따라서 벤더(Bender)도 그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최초의 아나밥티스트 운동은 루터가 고안한 불가시적 교회의 개념을 거부했다. 그리고 어떠한 특정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가시적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특성도 반드시 “눈에 보이는 분명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나밥티스트들이 불가시적 교회의 개념을 완전히 거부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그들은 쉬벵크펠트와 프랑크가 가르친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16세기 아나밥티스트들은 신약성경이 중요시 하는 다시 태어난 자들의 모임으로서 교회를 강조하였다.

교회의 타락

아나밥티스트들은 사도들의 초대교회가 그 순수성을 잃었으며 교회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파국을 “교회의 타락”이라고 불렀다. 비록 이것이 일반적인 개혁주의의 개념이지만, 타락의 발생 시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개혁주의자들은 그 시점이 교황이 정치적 권세를 갖게 되면서부터 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타락의 시작을 사비아누수(Sabianus)와 보니파스 3세(Boniface III)로 보았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그 시점을 정확히 힐데브란트(Hildebrand)(역자 주 :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그가 “성직계급의 권력”을 주장한 때로 보았다. 칼빈은 그 시점을 그레고리 대제(大帝)로 보았다. 그러나 아나밥티스트들은 일반적으로 그 시점을 콘스탄틴 통치 하에 교회와 국가의 연합으로 보았다. 1530년경 아우그스버그(Augusburg)에서 인쇄된 무명(無名)의 아나밥티스트가 저술한 소논문은 “사도시대부터 콘스탄틴 황제까지 옛 그리스도인 간에는 어떠한 세속적 권력이나 칼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타락에 대한 아나밥티스트의 해석은 개혁주의자들의 해석과 매우 달랐다. 개혁주의자들은 콘스탄틴 시대를 교회가 승리한 시대로 보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의 제식(祭式) 사회를 부지중에 채택한 콘스탄틴과 공생(共生)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식(祭式) 사회의 이교도들을 쉽게 간과했거나 기독교도로 만들려고 했으며, 통제하려고 애썼다. 아나밥티스트들에게 있어서 개혁주의는 교황권에 대한 반동이었지, 제도로서 교회에 관한 로마카톨릭의 개념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개혁주의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여러 가지 단체적인 견고한 전통에서 잘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로마카톨릭과 조직에서 완전히 분리된 후 조차도 여전히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개혁주의자들은 교회가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아나밥티스트들이 개혁주의자들을 반쪽 개혁주의자로 보았던 이유이다. 아나밥티스트들에게 개혁주의자들은 타락한 교회 안에 남아 있었다.

아나밥티스트들에게 로마카톨릭은 완전히 타락한 교회였다. 콘스탄틴의 통치하에 시작된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온갖 종류의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로 유아세례를 들 수 있다. 메노는 “유아세례를 강제적으로 시행하도록 한 인노센트 1세의 칙령(A.D. 407)을 타락의 절정”으로 보았다. 휘브마이어는 자신이 저술한 침례 서약에 관한 소책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침례받기 전에 알아야할 사항”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침례 서약이다. 사탄이 수도(修道) 서원(誓願)과 사제(司祭)의 서약(誓約)으로 밀고 들어가 거룩한 자리를 강제로 차지한 이후로 천년 동안 침례 서약은 상실되었다.”

유아 세례가 널리 행해졌을 때, 다시 태어난 자들의 교제로서 교회의 특성은 심각하게 변화되었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연합과, 이에 수반하여 강제로 국가 교회를 신봉하게 하려고 무력을 사용함으로써 교회는 완전히 타락하였다. 베르두인(Verduin)의 말을 빌리면, “교회의 타락은 그리스도의 신부의 용모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시켰다. 이전에 치유하고 돕는 사명을 띠고 보냄 받은 교회는 이제 경찰국가의 모습을 취했다.”


- William R. Estep 著 『The Anabaptist Story』5章 "Church and St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