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그람 마펙(Pilgram Marpeck)

by 배용하 posted Sep 2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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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는 ? 

마펙은 1525년 시로부터 많은 돈을 대출받을 수 있을 만큼 큰 부자였다. 소유 집도 몇 채나 되었다. 아내와 함께 마펙은 세 명의 고아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감각뿐만 아니라, 그의 부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부와 사회적 지위 덕택에 마펙은 귀족들의 모임에 자주 참여할 수 있었다. 키쯔뷔헬 (Kitzb?hel) 근처에 성을 갖고 있었던 프레이베르트 (Freybert)의 여백작 헬렌 (Countess Helene)과 가졌던 우정은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1525년 이후 몇 년 동안, 그의 인생은 매우 순조로운 것처럼 보였다. 필그람은 도시 의회의 핵심 구성원이었고, 그의 사업은 번창했고, 사회적 지위와 책임 또한 변함없이 지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그렇게 좋게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라텐베르그에서 지냈던 그의 인생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 어느 순간 그가 광산을 담당하는 광주의 자리에서 해고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비록 자세한 설명은 찾을 수 없지만, 정부관료로서 아나뱁티스트들을 잡아들이고 찾아내는 일을 도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절했기 때문이었음이 틀림없다. 1528128일은 레온하르트 시머 (Leonhard Schiemer)가 사형을 당한 지 꼭 2주가 되는 날이었다. 그로부터 대략 8개월 동안 그는 자신의 재산, , 지위를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에 의해 몰수된 그의 재산은 약 3,500길더나 되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토록 안정되고 존경받는 한 시민이었던 필그람 마펙을 도망자의 신세로 만들었을까? , 지위, 사회적 명성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기에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임이 틀림없다. 분명한 것은 마펙이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

-- 아나뱁티스트(매노나이트)의 역사(대장간 역간), 중에서